항목 ID | GC066008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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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憲永 |
이칭/별칭 | 김성삼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문경호 |
출생 시기/일시 | 1900년 05월 28일 - 박헌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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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2년 3월 - 박헌영 대흥보통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15년 3월 23일 - 박헌영 대흥보통학교 1회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15년 3월 24일 - 박헌영 경성고보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박헌영 경성고보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9월 - 박헌영 고려공산당 상하이지부 입당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박헌영 공산당 조직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다 일제에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박헌영 조선공산당 창당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박헌영 중국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징역 6년형 선고받고 국내에서 복역 |
활동 시기/일시 | 1939년 - 박헌영 출소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9월 - 박헌영 조선공산당 재건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 박헌영 남조선노동당 창당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박헌영 월북 |
활동 시기/일시 | 1953년 - 박헌영 북한에서 숙청되어 체포 |
몰년 시기/일시 | 1955년 12월 15일 - 박헌영 사망 추정 |
출생지 | 박헌영 출생지 -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333 |
학교|수학지 | 대흥보통학교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
학교|수학지 | 경성고등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
활동지 | 박헌영 활동지 - 서울특별시 |
활동지 | 박헌영 활동지 - 중국 상하이시 |
활동지 | 박헌영 활동지 - 북한 평양 |
성격 | 독립운동가|공산주의자 |
성별 | 남 |
본관 | 영해(寧海) |
대표 경력 |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북조선인민공화국 부수상 |
[정의]
충청남도 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정치인.
[개설]
박헌영(朴憲永)[1900~1955]은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북조선인민공화국 부수상을 역임하였으나, 한국전쟁 이후 숙청되었다.
[가계]
박헌영의 본관은 영해(寧海)이다. 아버지는 박현주(朴鉉柱)이고, 어머니는 이학규(李學圭)이다. 첫 번째 부인인 주세죽(朱世竹)과의 사이에 딸 박비비안나를 두었고, 두 번째 부인 정순년(鄭順年)과의 사이에 승려 원경(圓鏡)을 두었다. 그리고 세 번째 부인 윤옥[윤레나]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박헌영은 1900년 5월 28일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배우다가 12세가 되던 1912년 대흥보통학교에 입학해 1915년 졸업하였다. 같은 해 3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에 졸업할 때까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활동하였다. 경성고보 졸업 후 승동교회에 나가면서 미국 유학을 시도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자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9월 상하이로 건너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지부에 입당하였다. 1922년 김단야, 임원근 등과 함께 국내 공산당 조직을 위해 잠입하다가 신의주 경찰에 잡혀서 신의주 지방법원,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출소한 뒤인 1925년 조선공산당창당대회를 개최하여 국내에서 공산당 조직을 창설하였으며, 블라디보스토크와 상하이 등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헌영은 1933년 김단야와 『코뮤니티』라는 잡지를 제작하여 국내에 배포하려다가 상하이 일본 경찰에 잡혀 치안유지법과 출반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39년 만기 출소한 후 다시 김상룡 등을 만나 경성콤그룹을 지도하였으며, 1942년 광주로 피신하여 김성삼이라는 가명으로 공장 인부 생활을 하다가 광복 후 상경하여 김형선·이관술·김삼룡·이현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의 재건에 주력하였다. 1945년 9월 장안파를 흡수하여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으며, 당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이후 미군정 시기에 지하조직으로 활동하던 국내의 좌익 단체를 통합하여 1946년에 남조선노동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으나 그해 7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이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1948년 월북하여 북한에서 부수상 겸 외무장관을 역임하였다. 그 뒤 계속하여 북한에 머물면서 「박헌영서한」 등을 통해 남로당 활동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1953년 김일성의 일인독재화와 한국전쟁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진행된 남조선노동당 숙청으로 체포되어 1955년 사형이 확정되고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