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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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場市 |
이칭/별칭 | 시장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문경호 |
[정의]
조선 후기 이래 충청남도 예산 지역에서 열리던 사설 시장.
[개설]
예산 지역은 국도32호선을 따라 동남쪽의 공주 유구읍으로 이어지고, 동북으로는 천안, 서쪽으로는 홍성으로 이어진다. 장항선의 신례원, 예산, 삽교 등 주요 역들이 예산군내에 들어서 있어 도로와 철도가 잘 갖추어졌으며, 대흥을 따라 북으로 난 무한천을 따라 내려가면 삽교천을 거쳐 아산만에 닿는 등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또한, 예산은 농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하다. 과거 예산에 농토를 두고 한양에 살았던 지주들은 소작료를 모아 선장항에서 배를 띠워 제물포를 거쳐 한양의 마포와 송파로 실어갔다. 이와 같이 예산은 교통과 수운의 거점이었으므로 일찍부터 장시가 발달하였다. 예덕상무사라는 보부상 조직이 예산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것도 이러한 지리적인 이점과 관련이 있다.
[장시의 등장]
관공서를 거점으로 물자가 거래된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고려 말에는 사원이 물건을 매매하는 시장의 역할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 장시가 처음 등장한 것은 15세기 말, 전라도의 무안 지역 일대였다. 물산이 풍부하고 교통이 발달하여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장시가 형성된 것이다. 이후 농업생산력이 증가하여 잉여생산물이 늘어나고, 상업적 농업이 활기를 띠면서 전국으로 장시가 확대되었다. 그래서 18세기 중엽에는 전국에 1,000여 개소가 넘을 만큼 많은 수의 장시가 들어섰다. 조선 후기 장시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공인과 보부상이었다. 공인은 대동법 시행 이후에 등장한 어용상인으로 각 지역의 장시를 오가며 국가에 납품할 물자를 대량으로 사들였다. 반면, 보부상은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아 여러 장시와 지역을 오가며 물자를 팔았던 떠돌이 상인이었다.
조선시대 예산의 대표적인 장시는 삽교읍 하포리와 예산이었다. 하포리는 내륙지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근에 구만리 등의 포구가 발달하여 많은 상인들이 드나들었다. 예산은 내포 일대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예산장은 내륙의 물자와 인천과 한양에서 내려오는 물자가 만나는 곳이었으므로 장날에는 대략 3,000~6,000명의 사람들이 북적거릴 만큼 컸다고 한다. 장시가 번성하자 보부상들의 활동도 활발하여, 200~30명의 보부상들이 예산을 거점으로 청양, 아산, 홍주 등의 장시를 돌며 활동하였다.
[장시의 변화]
예산의 장시는 1876년의 강화도조약, 1882년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등으로 외국 상인들이 국내로 진출하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교통의 요지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개항장을 통해 들어온 석유, 값싼 면직물, 중국산 소금 등이 다른 지역보다 빨리 유입되고, 예산의 쌀, 콩, 쇠가죽 등이 인천으로 운반되어 수출됨으로써 유통이 이전보다 더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00년에 이르면 안성, 강경, 김천, 대구와 함께 예산이 전국의 5대 시장에 들어갈 만큼 성장하였다. 1909년 예산 시장의 거래액은 충청남도에서 가장 많았다. 그러나 호서은행이 설립되어 예산이 상업 중심도시로 성장하면서 보부상들은 상설 점포에 상권을 빼앗기고, 장시에 공급할 물건이 없어지면서 역할을 상실하였다. 장시 또한, 상설점포의 설립으로 그 역할이 약화되었다.
[현황]
예산의 장시는 5일장을 기준으로 열린다. 지금까지도 응봉·대흥·신암 지역과 오가의 동부 지역까지를 상권으로 하는 예산장을 비롯해, 삽교읍 고덕면·신양면 등에 소규모의 5일장이 형성되어 있다. 예산장에서는 쌀·사과·쪽파·고추 등이 많이 거래된다. 예산장이 5·10일, 삽교장이 2·7일, 고덕장이 3·8일, 신양장이 2·7일에 각각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