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10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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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基督敎韓國浸禮會 |
이칭/별칭 | 기침,침례교,침례회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성준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에 있는 개신교의 한 종파.
[개설]
17세기 초 영국에서 존 스미스(John Smith) 목사가 주도한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권위’로 여기는 공동체가 성장하여 1611년에 런던에서 침례교회가 성립되었다.
한국 침례교회는 1894년에 한국순회선교회[The Corea Itinerang Mission]를 조직한 캐나다 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1863~1935]의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펜윅과 협력 관계에 있던 엘라씽기념선교회(The Ella Thing Memorial Mission)에서 1895년과 1896년에 파울링(E. C. paulling) 부부와 스태드맨(F. W. Steadman) 부부를 한국에 파송하였다. 이 부부들은 충남의 공주와 강경, (부여)칠산 지역에서 선교에 착수하였다. 때마침 전라도 지역의 선교에 집중하고 있던 미국 남장로 교단과의 선교 분할 협정이 이루어져서, 충청도 선교는 침례교회에서 주로 맡았다. 하지만 엘라씽기념선교회의 자금난으로 1901년에 선교사들이 거의 철수하자, 선교 사업은 1896년에 입국하여 원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펜윅의 한국순회선교회에 통합되었다. 펜윅은 1906에 충남 강경에서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였으며, 주로 만주, 간도, 시베리아, 몽골 지역의 선교에 주력하였다. 그래서 1920년대 이후 소련과 몽골의 공산주의 정부의 극심한 박해를 당했다. 1921년 일제가 ‘대한’을 빼라고 강요하여 교회의 명칭을 동아기독교회로 변경했다가, 1933년 다시 동아기독대로 변경하였다. 1935년 펜윅이 사망하자 교세가 약화되었다. 1940년 일제가 ‘대’라는 명칭을 바꾸라고 강요하여 동아기독교로 변경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일제는, 포교계도 제출하지 않고 신사참배도 불응하는 동아기독교를 불순단체로 여기고 탄압하다가 1944년에 아예 해체시켰다.
광복 후, 북한과 만주 지역의 교세를 거의 상실한 채 1946년 2월 부여 칠산과 강경에서 지도자들이 모여 교단재건회의를 열어서 교단의 체제를 일반 기독교회와 비슷하게 바꾸었는데, 이때 경북 예천 지역의 10여 개 교회가 이에 반발하여 ‘대한기독교’를 조직하여 분립하기도 하였다. 1949년 39차 총회를 충남 강경에서 소집하여 교단의 명칭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변경하고 미국 남침례회와 제휴하였다. 남침례회는 한국전쟁 중에 의료와 구호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전쟁 후에는 미국식 교육과 선교를 지향하였는데, 펜윅이 배출하였던 기존의 한국 지도자들이 이에 반발하였다. 내부의 갈등이 커지다가 1959년에 미국 남침례회의 노선을 따르는 총회가 충남 대전에서, 기존의 동아기독교 노선을 고수하는 총회가 경북 포항에서 각각 개최되어 9년 간 교단이 분열되었다. 하지만 분열 시기에 침례교회는 성찰과 혁신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1968년 4월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과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이라는 명칭으로 분열되었던 교단이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이후 대전에 있는 한국침례신학교 출신의 젊은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교회의 쇄신과 선교 부흥 운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1970년대부터 침례교회는 교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그리고 1976년 11월 교단 명칭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변경하였다.
[변천]
예산 지역의 침례교회는 1910년 6월 광시에서 초대 이우로 전도사의 가정에서 이정회 가족을 중심으로 창립예배를 드리고 교회의 명칭을 ‘광시교회’로 하면서 시작되었다. 예산읍에서는 1930년 윤근영이 예산읍 발연리 자택에서 몇 사람의 교인들과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발연리 제일침례교회의 시작이다. 1938년 8월 동아기독교회 이름으로 예산기독교연합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41년 광시리포교소를 다시 설치하고 조선인 송원광춘(松原光春)이 교역자로 부임한 『조선총독부 관보』의 기록이 있다. 예산 지역의 동아기독교회는 1943년 9월 일제의 탄압으로 예배당을 폐쇄당하였다. 해방 후 1949년 10월에 광시침례교회를 재건하였고, 1958년에는 예산 발연리 침례교회도 재건하였으며, 이후 여러 곳에 침례교회가 건립되었다.
[현황]
광시침례교회, 예산 발연리 제일침례교회, 예산침례교회, 신례원침례교회, 예산 다운교회, 예산 신례원의 실로암교회, 신양제일침례교회, (오가)원천침례교회 등 8개의 기독교한국침례회 소속의 침례교회가 예산군에서 활동하고 있다.
[의의]
예산 지역의 침례교회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광시 지역을 시작으로 전파되어, 1943년에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당하기도 하였지만, 해방 후 재건하여 지역의 교회로 꾸준히 활동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