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10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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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時公所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광시리·동산리·가덕리 일대 |
시대 | 조선/조선 후기,현대/현대 |
집필자 | 한성준 |
설립 시기/일시 | 1890년 - 광시공소 역말공소로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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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2010년 - 광시공소 해체 |
개칭 시기/일시 | 1945년 8월 15일 이후 - 역말공소에서 광시공소로 개칭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6년 - 광시공소 응봉성당 소속 공소로 편성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0년 - 광시공소 응봉성당 제7구역으로 편성 |
현 소재지 | 광시 공소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광시리 |동산리|가덕리 일대 |
성격 | 종교 기관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광시리·동산리·가덕리에 있었던 천주교 대전교구 응봉성당 소속 공소.
[개설]
광시 지역에는 조선 후기 천주교 전래 초기부터 신자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1886년(고종 23) 선교의 자유 허용 이후 몇 개의 공소가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변화 속에서 광시 지역의 공소는 광시공소로 통합되었으며, 양촌본당, 합덕본당과 예산본당 소속을 거쳐 1986년부터 응봉면의 응봉성당 소속의 공소가 되었다.
[설립 목적]
광시공소는 천주교 전래 초기부터 광시·대흥 지역에 이어져 온 천주교 신앙의 맥을 이어 광시·대흥 지역에 천주교를 선교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변천]
광시 지역에는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주한 신자들이 금북 정맥 줄기의 백월산 골짜기에 모여들어 교우촌(敎友村)을 형성하였다.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 때 홍주목 관할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명단 중에서 대흥 출신 김정득이 있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 홍주목 관할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명단에도 대흥 ‘흐리나점’ 출신 황춘성, 원응지가 있고, 그 외에도 대흥 출신 10명의 순교자가 나타난다. 파평윤씨 문중의 세거지인 가덕리의 천주교 신자들이 문중에서 파문당하고 부여 지역으로 이주하여 같은 이름의 ‘가덕리’를 형성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886년 선교의 자유 허용 이후 고지골[서초정리], 간은정[가덕리], 나발티[마사리], 역말[광시리] 등의 공소가 형성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역말공소와 노전리공소 두 개로 통합되었고, 8.15해방 이후 광시공소 하나로 통합되었다. 광시공소는 양촌본당, 합덕본당, 예산본당 소속을 거쳐 1986년부터 응봉성당 관할에 속하였다. 광시공소는 2010년 이후 해체되어 대흥 지역과 함께 응봉성당 제7구역으로 편성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조선 후기 박해 시대에 광시 지역에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여 신앙의 맥을 이어왔다.
[현황]
예산 지역 천주교의 중심지가 도심지 발달에 맞춰 예산, 삽교, 덕산, 신례원으로 이동하면서 광시 지역에는 본당이 서지 못하고, 응봉성당 관할의 광시공소[응봉성당 제7구역]로 남게 되었다. 이는 광시 지역 천주교의 기반이 점차 약해진 반면, 개신교는 1900년대부터 홍성·예산을 중심으로 전파되면서 교세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의의와 평가]
광시공소는 내포 지역 천주교 신앙의 중요한 보금자리 중 하나이다. 박해 시대에는 신앙의 근거지 역할을 담당하면서 초기 천주교 신앙 공동체의 전통을 계승하고 선교하는 역할을 맡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