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14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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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禮山-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월산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표윤명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9년 - 「장예산 집」 예산문화원에서 발간한 『예산의 설화』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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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월산리 -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월산리 |
관련 지명 | 구억말 -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월산리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장석구|김구례|여각 주인 |
모티프 유형 | 인물 행적담|지명 유래담|신분 상승 설화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월산리에 전해지고 있는 장예산과 관련한 이야기.
[개설]
「장예산 집」은 예산군 삽교읍 월산리에 전해지고 있는 장예산과 관련한 인물 행적담이자 지명 유래담이다. 평민인 장석구가 검은 암소 50마리를 끌고 한양으로 올라가 임금을 만난 뒤 예산군수에 임명된 이야기이다. 장석구가 예산군수가 되었기에 이후 장예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채록/수집 상황]
「장예산 집」은 1999년 예산문화원에서 발간한 『예산의 설화』에 실려 있다.
[내용]
예산군 삽교읍 월산리에 8대 부자로 살아온 장예산의 집이 있었다. 장예산은 조선 시대 말엽 사람인데, 본명은 장석구이다. 장석구는 원래 가난한 평민이었으나 쪽지게와 패랭이를 판 돈을 모아 만석지기가 되었다. 평민이라는 신분 때문에 양반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당한 장석구는 자신의 억울함을 왕에게 직접 호소하기로 작정하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한양에 도착한 장석구는 대신들이 많이 드나든다는 여각에 머물렀다. 여각에 머물기를 3년, 장석구를 유심히 본 여각 주인이 ‘이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부자이기에 우리 여각에서 3년씩이나 머문단 말인가? 정말 대단한 부자인가 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여각 주인은 장석구를 초대하여 어떤 사정이 있는지 물었다. 장석구의 사정을 들은 여각 주인은 운현궁의 김구례라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장석구가 김구례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더니, 김구례가 “며칠 후면 전하의 생신인데, 그때 크게 한번 진상을 해 보아라.” 하는 것이었다.
장석구는 부랴부랴 집으로 내려와서 검은 암소 50마리를 끌고 다시 한양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궁궐 앞에 소 떼를 매어 놓았다. 만조백관이 모여 조례를 할 때, 소 울음소리를 이상히 여긴 왕이 물었다. 그러자 “충청도 사는 아무개가 전하께 진상을 드리려는 것이옵니다.” 하고 아뢰니 왕이 블러들여 드디어 장석구는 왕 앞에 서게 되었다.
왕이 “너는 어디서 왔으며 이름은 무엇이냐?” 하고 물으니, 장석구는 “저는 충청도 예산에서 온 인동장가이옵니다. 상감마마를 뵙고자 한양에 올라와 3년이나 기다렸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왕이 기특하게 여기며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 장석구는 왕에게 양반이 될 수 있는 증서를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왕은 “너는 예산군수나 하여라.”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장석구는 ‘장예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장예산은 군수가 되어 내려오는 도중에 잠깐 쉬다가 가마꾼 중에 자신의 당숙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장예산은 군수임에도 불구하고 당숙 앞으로 가서 공손히 절을 하고 융숭히 대접하기까지 하였다. 이후로 장예산의 인물됨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왕도 성묘를 갈 때면 늘 장예산의 집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장예산의 집은 열두 대문에 아흔아홉 칸짜리 큰 집이었다고 한다. 또한 장예산의 집의 종자 수량이 구억 말이나 되어 월산리를 ‘구억말’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장석구의 행적을 그린 인물 행적담이자 구억말이라는 지명에 얽힌 지명 유래담이다. 평민인 장석구가 왕을 만나 양반이 된 내용을 담은 신분 상승 설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