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534
한자 伽倻山-名所伽倻九谷
이칭/별칭 가야산,가야구곡,강문팔학사,윤봉구,문화재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해준

[정의]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1681~1767]가 가야구곡이라고 칭한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의 절경과 가야산의 문화유적을 개관하고자 한다.

[개설]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가야산(伽倻山)은 내포 지역을 상징하는 산이다. 내포는 과거 육로 교통이 불편하였던 시절, 내륙 깊숙이 올라온 바닷물에 의지하여 해상교통이 발달하였던 지역이다. 내포의 중심이 되는 진산인 가야산에 오르면 내포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넓은 평야와, 평야를 관통하는 하천이 있는 내포의 지리적 특성을 바로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강문팔학사의 한사람인 병계 윤봉구가야산 절경을 가야구곡이라고 칭하였다. 가야구곡은 제1곡 관어대(觀魚臺), 제2곡 옥병계(玉屛溪), 제3곡 습운천(濕雲泉), 제4곡 석문담(石門潭), 제5곡 영화담(暎花潭), 제6곡 탁석천(卓錫川), 제7곡 와룡담(臥龍潭), 제8곡 고운벽(孤雲壁), 제9곡 옥량폭(玉梁瀑)를 일컫는다.

[내포 가야산의 역사 문화 자원]

가야산은 주민들 사이에서는 가야산이라는 이름보다 개산이라고 불리는데, 개산이란 이름은 안개에 있는 산이란 뜻이다. 원래 가야산의 어원은 석가모니가 해탈한 부두가야의 가야에서 온 이름이다. 지금도 가야산은 상왕산[산스크리트어로 상왕은 부처를 뜻함], 석문봉, 원효봉, 보현동 등의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가야산이 언제부터 오늘날과 같은 지명인 가야산으로 불렸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시대별로 가야산과 관련된 지명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야산은 신라 통일 후 백제 옛 산천에 설치된 중사(中祀)[나라에서 지내던 대사(大祀) 다음가는 제사]로, 신사를 만들어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던 가야갑악(加耶岬岳)으로서 신성시하였다. 백제시대 마애불과 사방불이 가야산과 주변에 많은 것도 바로 그러한 배경을 지닌다고 할 것이다. 또한 내포 지역이 중국에서 신문물이 들어오는 창구 역할을 하였던 것도 크게 작용하였다.

통일신라시대 가야산과 관련된 기록은 가까운 보원사지와 관련한 것이다. 즉, 장흥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 체징의 비와 진성여왕 대 부성군[지금의 서산] 태수를 지낸 최치원이 쓴 「법장화상전」에 나오고 있다. 884년에 만들어진 장흥 보림사 체징의 비에는 827년 체징이 구족계를 받은 곳이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라는 기록이 나오며, 최치원의 글에서는 웅주(熊州) 가야협(加耶峽) 보원사(普願寺)라고 나온다. 즉, 가야라는 지명과 가량이라는 지명이 같이 쓰이고 있다.

고려시대로 내려오면 가야사를 통해 가야산에 대한 지명을 더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가야산 북쪽으로는 보원사가 있고, 동쪽에는 가야산의 대사찰로 가야사가 있었다. 가야사는 『고려사』 1177년(명종 7) 기록에 망이·망소이난과 관련하여 가야라는 명칭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고려시대 가야산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최근 발굴 조사된 가야사지에서 가량갑(加良岬)이라는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이 명문 기와와 연관 있는 통일신라시대 광자대사와 진철대사의 불적에 가야갑사 기록이 있어 통일신라시대까지 가야사의 연원이 올라갈 수 있는 점과 가량갑의 지명이 통일신라시대부터 쓰였던 내용이 고고학 자료로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산천조에 현재 지명인 가야산(伽倻山)이란 명칭으로 나오고 있어 당시에 가야산이란 지명이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아울러 가야산의 지맥인 문수산, 상왕산의 명칭이 별도로 불리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지역에서는 가야산의 세부 지명에 대한 다양한 인식이 있었음도 알 수 있다.

내포 지역과 관련하여 가야산이 주목된 것은 조선 후기 인문 지리지인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 언급되면서이다. 『택리지(擇里志)』에서 서산·해미·태안·면천·당진·홍주·덕산·예산·신창, 등 가야산이 품고 있는 앞뒤 10고을을 내포(內浦)라 하였으며, 이에 충청도 서북부라는 공간적 범위를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문화권으로 설정하는 개념으로서 내포 지역과 가야산이 주목받게 되었다.

[가야산과 문화유적]

가야산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불교 유적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가야산에는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보물 제794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호]의 백제시대 불교 유적이 백제의 미술문화, 불교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백제시대 가야산 동쪽에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이 중국 남조 석굴사원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로 6세기 전반에 조성되었으며, 7세기에 이르러서는 가야산 북쪽 봉우리 상왕산 용현계곡에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조성되었다. 당시 이러한 규모의 불상 제작은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를 비롯한 한반도 어느 곳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가야산의 백제 석불들은 태안반도에서 공주, 부여 도성으로 연결되는 교통로 내지 대중국 교역로로서의 지리적 특성과 관련되어 주목받아 왔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서산 보원사지[사적 제316호]와 가야사지가 대표적인 불교 유적이다. 보원사지에는 웅장한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04호]과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제102호] 등이 보원사의 규모와 융성함을 전하고 있다. 특히 보물 제105호와 제106호로 지정된 서산 법인국사 탑과 서산 법인국사 탑비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사상을 폈던 인물 탄문(坦文)[900~975]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서산 법인국사 탑비에 따르면 개경에 머무르던 탄문이 보원사에 돌아오자 탄문을 맞이하는 승려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탄문은 고려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승려로서 내포 지역의 불교 세력이 고려시대에도 중앙 정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만큼 대규모 집단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가야산 주변에 미륵불들이 조성되기 시작하는데, 예산 지역은 상가리, 신평리, 읍내리, 석곡리 미륵불들이 있고, 서산 지역에는 황락리, 조산리, 반양리, 산수리, 용장리 미륵이 지금도 남아 있다. 아울러 폐사된 사찰과 보덕사, 원효암, 일락사, 문수사 등의 사찰이 가야산 곳곳에 남아 있다.

[가야구곡의 현재]

현재 가야구곡가야산 입구인 덕산면 옥계리에서 상가리까지 약 3㎞의 걷는 길이 가야구곡 녹색길이라는 이름으로 2011~2012년도에 조성되었다. 과거 병계가 거닐었던 가야구곡 길은 개발이라는 풍파에 그 원형이 많이 훼손된 채 남아 있다. 또한, 가야구곡가야구곡 녹색길이라는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만 이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가야구곡 중 문화재로 가치가 있는 자료에 대해서는 문화재 지정 및 가야구곡 스토리텔링 개발을 통하여 역사 문화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아울러 가야산의 다양한 불교 유적, 왕실 유적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기초 조사 자료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현재 가야산으로 가는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가야구곡 길내포문화숲길로 연계되어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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