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15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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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正喜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조성 시기/일시 | 1856년 - 김정희 과천에 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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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786년 - 김정희 출생 |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856년 - 김정희 사망 |
이장 시기/일시 | 1937년 - 김정희묘 예산으로 이장하면서 첫째 부인 한산이씨, 둘째 부인 예안이씨의 묘 합장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05월 17일 - 김정희묘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8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김정희묘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34년 - 김정희묘 묘비 건립 |
현 소재지 | 김정희묘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
원소재재 | 김정희묘 - 경기도 과천시 |
성격 | 능묘 |
양식 | 봉토묘|합장묘 |
관련 인물 | 김정희|한산이씨|예안이씨 |
관리자 | 예산군 |
문화재 지정 번호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조선 후기 학자 김정희의 묘.
[개설]
김정희묘는 경기도 과천에 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와 김정희의 첫째 부인 한산이씨의 묘와 둘째 부인 예안이씨의 묘를 1937년 선조(先祖)가 있는 예산으로 이장하여 합장한 합장묘이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로 자는 원춘(元春)이며, 고향은 예산이다.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 등 100여 가지가 넘는다.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에게 출계하였다. 박제가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연경(燕京)에 간 것을 계기로 경학·금석학·서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경학과 고증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 학문 연구의 중요한 목적은 실사구시이며, 훈고(訓詁)로써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금석학에 몰두해 이전까지 무학(無學)의 비석으로 알려져 있던 북한산 비석이 신라진흥왕순수비임을 고증하였다. 특히 글씨에서는 특정한 서체에 구애되지 않고 역대 명필의 장점을 모아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개발하였다.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해 대사성, 이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를 둘러싸고 귀양을 가는 등 모두 13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하였다. 1851년(철종 2)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난 뒤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에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사망하였다.
[위치]
김정희묘는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다. 김정희 선생 고택[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에서 서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구릉을 2단으로 정지한 다음 안치하였다.
[형태]
김정희묘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오른쪽 앞에 김정희 사후 82년이 지난 1934년 세운 묘비가 있다. 비석은 장방형의 화강암 대좌 위에 오석의 비신이 올려져 있고 오석 위에는 옥개형 이수를 올렸다. 비신의 앞면에는 ‘완당선생 경주김공휘정희 묘(阮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라고 쓰여 있고, 나머지 3면에는 비문이 적혀 있다. 비문은 김승렬(金承烈)이 짓고 썼으며, 비신의 크기는 높이 149㎝, 폭 55㎝, 두께 29㎝이다. 묘의 좌우로는 석주가 각각 1기씩 세워져 있으며 묘역 주변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있다.
[현황]
김정희묘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예산군에서 유적을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정희묘는 주변에 있는 김정희 선생 고택, 화암사, 예산 용궁리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 등과 함께 예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추사 김정희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