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하씨 묘 출토유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047
한자 晉州河氏 墓 出土 遺物
영어공식명칭 Jinju·Hassi·Myo·Chulto·Yumul|Relics Excavated from Tomb of Ha Clan in Jinju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21[황금동 70]|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민선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토|발굴 시기/일시 1989년 4월 - 진주하씨 묘 출토유물 진주하씨 이장 과정에서 출토
문화재 지정 일시 1993년 7월 23일연표보기 - 진주하씨 묘 출토유물 중요민속문화재 제229호로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21년 6월 29일 - 진주하씨 묘 출토유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현 소장처 국립대구박물관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21[황금동 70]지도보기
출토|발견지 진주하씨 묘 출토유물 출토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지도보기
성격 의복류|침구류|서간문|생활 도구
소유자 국립대구박물관
관리자 국립대구박물관
문화재 지정 번호 국가 민속문화재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된 진주하씨 묘에서 나온 편지와 복식 유물.

[개설]

진주하씨 묘 출토유물(晉州河氏墓出土遺物)은 1989년 4월 현풍곽씨(玄風郭氏)의 후손들이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었던 12대 조모인 진주하씨(晉州河氏)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출토되었다. 진주하씨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사촌 형제의 아들인 곽주(郭澍)의 둘째 부인이며, 진주 출신 하준의(河遵義)의 맏딸이다. 곽주는 첫째 부인이 죽고 나서 진주하씨와 결혼하여 자식으로 4남 5녀를 두었다. 진주하씨는 정확한 생사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1646년 무렵 쓴 것으로 보이는 편지가 출토됨에 따라 17세기 중기에 살았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진주하씨 묘 출토유물은 1993년 7월 23일 중요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재] 제229호로 지정되었다.그 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현재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70에 있는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진주하씨 묘 출토유물 중 서간문은 한글 편지 149건, 한문 편지 5건, 치부 기록 14건이 포함되는데, 질병과 치료, 금기일과 삼가하여야 할 일, 아이들의 행실 교육, 언문[한글] 가르치는 이야기, 돌잡이하는 모습, 금전 출납 등이 적혀 있다. 한글 편지는 한글 흘림 글씨이며, 1602년부터 1646년까지 44년 동안 남편인 곽주와 시어머니, 시집간 딸 등 가족에게 받은 편지이다.

복식류는 장의 4점, 창의 1점, 저고리 8점, 버선 18점, 속곳 14점 등 70여 점이다. 장의는 나들이할 때 머리에 써서 몸을 가리던 것인데, 무명 솜 장옷과 무명 겹장옷, 삼베 홑장옷, 모시 홑장옷이 각각 1점씩이다. 두루마기와 비슷한 창의는 여러 조각으로 찢겨져 있었다. 뒷길이는 118㎝, 품은 46㎝이며, 옆트임의 시작점에는 단추 장식이 달려 있다. 저고리는 겹저고리 2점, 모시 적삼 1점, 무명 적삼이 6점이다. 치마는 각각 길이 85.5㎝, 94㎝의 11폭 무명 홑치마이다. 바지는 밑 트인 바지 4점, 밑 막힌 바지 14점이고 모두 무명 겹바지이다. 버선은 이불과 함께 모두 18켤레가 출토되었다. 발 길이 22.5~26.5㎝, 버선 높이 25~30㎝, 버선목은 16.5~19.5㎝로 거의 비슷한 크기이다.

이 외에도 이불, 베개, 돗자리, 머리 빗는 도구를 담아 두던 그릇과 도구 그릇을 쌌던 보자기, 나무틀만 남은 삽 2점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진주하씨 묘에서 출토된 한글 흘림 글씨의 편지는 17세기 전기의 국문학, 국어학, 민속학, 서지학에서 중요한 자료이며, 당시 경상도 지역의 풍속이나 부녀자의 주변 생활 등이 적혀 있는 편지 내용은 문학사·생활사·여성사·문화사 등의 자료로도 가치가 크다. 또한 함께 출토된 다양한 복식 유물은 대부분 무명으로 제작된 17세기의 것이어서 복식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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