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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산두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1037
한자 崔山斗
이칭/별칭 경앙(景仰),신재(新齋),농중자(籠中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권수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83년연표보기 - 최산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00년 - 최산두 조광조에게 수학
활동 시기/일시 1504년 - 최산두 진사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13년 - 최산두 별시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14년 - 최산두 홍문관 저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16년 - 최산두 박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17년 - 최산두 홍문과 수찬, 홍문관 정언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18년 - 최산두 보은 현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19년 - 최산두 동복 유배
활동 시기/일시 1533년 - 최산두 해배
몰년 시기/일시 1536년연표보기 - 최산두 사망
사당|배향지 도원 서원(道源書院)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연월리 915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초계(草溪)
대표 관직|경력 사인(舍人)

[정의]

조선 전기 기묘사화 때 화순으로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경앙(景仰), 호는 신재(新齋)·농중자(籠中子). 아버지는 한성판윤 최한영(崔漢榮)이며, 어머니는 교리 한경회(韓敬澮)의 딸이다.

[활동 사항]

최산두(崔山斗)[1483~1536]는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을 사숙하였는데,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한 자질을 갖고 있었다. 6세 때 글을 배우러 다니다가 하루는 비를 맞고 밤길에서 도깨비를 만나 문답을 나누었는데, 도깨비가 그를 ‘사인(舍人)’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자라서는 문장이 특출하여 현감이 그것을 기특하게 여기고 문방구를 하사하였다. 15세 때는 『강목(綱目)』 80권을 가지고 석굴(石窟)에 들어가서 2년간 수천 번을 읽고 나오니 시냇물과 나뭇잎이 모두 강목의 글자로 보였다 한다.

18세에 상경하여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3년(중종 8)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1514년에 홍문관 저작, 1516년에 박사, 1517년에 홍문관 수찬과 홍문관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8년에 보은 현감이 되었으며, 승정원에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론할 사람 26명을 선발하였는데 그가 첫째로 뽑혀 호당에 들어갔다.

1519년에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으나 기묘사화로 화순 동복의 나복산(蘿葍山) 아래에 유배되었다. 1533년에 해배된 뒤에도 계속 그곳에서 살았는데, 그에 의해서 적벽(赤壁)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문장이 뛰어나 유성춘(柳成春)·윤구(尹衢)와 함께 ‘호남 삼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뛰어난 제자로는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을 꼽을 수 있다.

[학문과 저술]

유집에 『신재집(新齋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연월리에 있는 도원 서원(道源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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