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6·25 전쟁의 역사가 서린 백아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006
한자 六二五戰爭-歷史-白鵝山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수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문안식

[개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0년 6·25 전쟁 때까지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산 일대에서 국군과 북한 비정규군[빨치산]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다. 백아산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남한에 고립된 북한군과 좌익 게릴라들이 순창 회문산 및 지리산 등과 더불어 아군과 수많은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의 한 곳이다. 백아산 일대에서 활약한 유격대는 여수·순천 사건의 잔류 반란 세력과 탄압을 받은 좌파 인사가 중심이 되었다. 6·25 전쟁 후 인민군 잔류 세력이 백아산 등에 입산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다.

[역사적 배경]

8·15 해방 후 남로당 활동에서 유격 투쟁을 배합하게 된 것은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비롯된다.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 활동에 대한 탄압과 주요 핵심 인물에 대한 검거 선풍이 남로당이 폭력 전술로 노선을 바꾸게 한 주요 요인이었다.

[백아산 유격 활동의 기원]

남로당은 1948년 ‘2·7 투쟁’과 ‘5·10 선거 반대 투쟁’을 통해 부분적인 무장 투쟁 전술을 채택해 비폭력적인 정치 투쟁을 지원토록 하였다. 4·3 제주 항쟁의 여파로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 순천에서 남조선 국방 경비대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14연대는 반란 후 지리산으로 들어가 11월 하순에 유격 거점을 마련하였다.

여순 봉기를 일으킨 세력들은 순천, 광양 등의 산악 지대로 들어가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유격 전구를 형성하였다. 반란에 참여한 병사들이나 무장한 인민들을 중심으로 장기적이고 조직적인 항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유격 전구의 형성을 계획하였다.

그 일부는 순천을 장악하고 계속 벌교, 고흥, 보성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다른 부대는 구례, 곡성, 남원 등으로 북상하면서 2천 명 규모의 무장 세력을 형성하여 백운산과 지리산 등에 거점을 확보하였다. 무장 투쟁의 근거지를 구축한 지리산 중심의 빨치산 부대는 점차 인근 지역으로 활동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한편 각 지역의 남로당 조직과 14연대 반란군은 곳곳에서 관공서를 습격하였다. 전라남도 구례 지역에 국한되었던 관공서 습격은 11월 중순 이후 곡성·화순·광양, 전라북도 남원·무주·장수, 경상남도 거창·함양·산청·진주·하동 일대로 번져 갔다. 이때 좌익 세력들이 전라남도 지역의 유격 활동의 거점을 마련한 곳이 백아산이다.

[유격 활동의 내용]

백아산은 지리산과 무등산을 잇는 길목이며, 산세가 조밀하여 유격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최적지였다. 남로당이 백아산에 유격 활동의 거점을 마련한 것은 여순 사건 직후였다. 국군은 빨치산들이 백아산을 중심으로 무장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자 1949년 10월에 이르러 5연대 3대대를 파견하여 토벌에 나섰다.

토벌대는 먼저 화순군 북면 원리 주재소 앞과 아산 초등학교 교정에 면민을 집합시킨 후 입산자 가족을 색출하였다. 또한 북면의 외딴 마을 10여 곳의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 주민들을 이주시킨 후 마을 주변에 대나무와 소나무 등을 세워 울타리를 막고 출입문에 보초를 세워 출입자를 통제하였다.

1949년 가을에 이르러 유격대들은 관공서나 군부대, 경찰서 등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북면 학천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15연대 3대대 1중대 병력이 유격대의 습격을 받아 몰살당하기도 하였다. 백아산 유격대의 공격은 9월 공세 또는 아성 공격(牙城攻擊)으로 불리는 총공세에 따른 것이었다.

북한은 9월 총공세를 지원하기 위하여 유격대를 남파시켰다. 남한의 여러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던 유격대는 9~10월 중에 25개의 대도시 및 소도시, 읍 등에 대한 습격을 자행하였다.

[군경의 토벌 작전]

남한 정부는 좌익의 적극 공세에 맞서 1949년 9월 말에 게릴라 근절과 지방 좌파 세력 뿌리 뽑기에 나섰다. 이른바 동계 대토벌 작전이다. 군경 토벌대들은 전략촌 건설 및 소진(消盡), 소개 작전(疏開作戰)을 폈다. 1949년 여름까지 매월 평균 300~400명을 기록했던 토벌에 의한 게릴라 사상자 수는 9월 이후 급격히 증가하여 800~1,000명까지 급증하였다. 군경 합동으로 진행된 1949년 12월부터의 동계 토벌 작전은 사살 365명, 생포 187명, 귀순 4,964명의 전과를 올리고 1950년 3월에 막을 내렸다.

동계 토벌 작전은 무장 유격대에게 결정적 타격이 되었다. 한때 수천 명에 달했던 남한 유격대는 거의 완전히 붕괴하였다. 유격대들은 이동과 은신에 유리한 소규모 조직으로 재편하여 민간 속에 잠입하거나 지하 투쟁으로 전환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생존 전략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백아산의 유격대 역시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소규모 단위로 빨치산 활동을 지속하였다.

[6·25 전쟁 후의 유격 활동]

6·25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 만에 전라남도의 전역은 북한군에 점령당하였다. 전라남도 지역은 3개월 여 동안 북한군의 치하에 놓였다. 그러나 UN군이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 공격전을 개시하자, 퇴로를 차단당한 패잔 병력과 적색 분자들은 곳곳에서 유격대를 조직하고 무장 활동을 전개하였다. 북한군이 퇴각한 1950년 9월 이후 패잔병, 구 빨치산, 인공 부역자 등이 모두 입산해 산간 지대 인민 유격대의 숫자는 급격히 불어나 한때 전국적으로 5만~8만 명으로 추산될 정도에 이르렀다.

이들 중에는 점령 치하에서 인공의 당정 조직에 관여하였다가 북한군이 후퇴하자 부역 행위가 탄로나 처벌을 받을까봐 두려워 산으로 달아났던 사람이 많았다. 지리산에 유격 총본부를 설치하고 험준한 산악 지대를 배경으로 하여 각처에서 군경의 보급로 차단, 식량 약탈, 경찰 지서 및 관공서 습격, 차량 기습, 통신 방해와 살인, 방화 등을 자행하였다.

전라남도 지역에서 활동한 무장 유격대의 근거지는 백아산이었다. 백아산은 높이 810m에 이르는 험준한 산악 지대이며, 주변에는 수많은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어 유격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천연의 요충지였다. 백아산 기슭에 1950년 9월 25일 도당 유격대가 설치되었고, 10월 5일에는 조선 인민 유격대 전남 총사령부가 발족되었다. 전남 총사령부의 책임자는 조선 노동당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朴永發)이었으며, 총사령관에는 도당 부위원장 김선우(金善祐)가 임명되었다.

전남 총사령부는 무등산, 누령, 화학산, 불갑산, 모후산, 백운산에 각각 본부를 두는 6개 지구로 나뉘었다. 주요 활동은 군경의 보급로 차단, 경찰서와 지서 습격, 통신망 절단, 교통망 공격, 우익 인사에 대한 살인 및 방화 공격 등이었다. 특히 전라남도 지역에는 인공 체제를 모방한 통치 기구가 구성된 곳이 많아 민간인과의 연계가 수월하였다. 학력과 경력이 다양한 유격대원을 대상으로 한 정치 학습도 병행하였다.

백아산 총사령부[빨치산 유격대 사령부]는 노치리 놀치 뒷산 높이 약 700m 고지에 있었고, 노치와 동화 계곡 등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백아산의 산골짜기 일대에 빨치산 전남 도당부와 전남 유격대 총사령부, 광주 부대, 전남 도당 학교가 들어섰다. 전라남도 빨치산의 대장인 박영발 도당 위원장도 이곳에 머물렀다. 산속 곳곳에 발동기와 연자방아를 두고 식량을 조달하며, 바위와 작은 굴속에서 솟아나오는 샘물로 연명하며, 장기 항전을 펼쳤다. 박영발과 김선우가 지휘하는 전남 유격대는 백아산, 조계산, 백운산 일대에 약 2,000명 정도가 있었다.

[토벌대의 진압 작전과 성과]

한편 남한 정부는 1950년 10월 중순에 이르러 11사단을 창설하여 호남 지구와 지리산 지구의 유격대 토벌을 전담시켰다. 10월 15일 국군 11사단 20연대가 백아산 부근으로 진주하여 빨치산의 주력 박멸 작전을 전개하였다. 11사단은 토벌에 나서면서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구사하였다. 사단장 최덕신(崔德新)은 작전 지역 내 산간 마을을 모두 불을 질러 유격대의 근거지를 없애고, 백아산을 거점으로 저항하는 적군을 고립시키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초토화 작전으로 이서면 21개 마을, 담양군 남면 대덕면 5개 마을, 북면 24개 마을 등 모두 50개 마을이 소각되었다. 마을에 불을 질러 초토화하고 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미처 피난하지 못한 주민은 유격대를 따라 낮에는 산으로, 밤에는 마을로 이동하면서 생명을 이어갔다. 이 작전은 주민들의 반감을 키워 자진 입산자를 늘리는 역효과를 내기도 하였다. 백아산 일대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 공화국’이라는 상황이 1951년 봄까지 지속되었다.

본격적인 토벌 작전은 1951년 봄에 이르러 추진되었다. 이서면에 주둔하던 국군 일부가 백아산 인근의 하다 앞산과 와천 앞산 고지 등으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다. 4월 15일에 이르러 11사단을 대신하여 8사단이 호남 지구 토벌 작전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8사단은 예하 부대 및 전투 경찰대, 청년 방위대 병력을 지휘하여 백아산 지구, 장흥군 유치면 구사봉 지구에서 준동하는 잔류 세력 소탕 작전에 나섰다.

1951년 7월에는 경찰 병력이 안개 낀 날씨를 이용하여 토벌에 나섰다. 화순 경찰서 서장 김호용의 지휘 아래 박춘식과 우재호가 이끄는 기동대 2개 소대 및 광산 경찰서의 오동열이 이끄는 중대 병력이 격전 끝에 고지를 탈환하였다. 김호용은 탈환한 고지를 지키기 위하여 목포와 무안, 해남 및 강진의 경찰 병력과 노무원 등 480명을 주둔시켰다. 그러나 다음 날 빨치산들의 포위 공격을 받아 전원 전사를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백아산 토벌 작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광주의 미 고문단에게 공중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미군 전폭기가 공격에 나섰다. 토벌대는 광주의 20연대, 전남 경찰국 김동진 대대, 화순 경찰 부대를 비롯하여 담양과 곡성 경찰대 등이 연합 공격에 나섰다. 토벌대의 공격에 앞서 미군의 전폭기가 출동하여 백아산화학산 등지를 여러 차례에 걸쳐 폭격하였다. 전폭기 1대가 유격대에 의해 백아산에 추락할 정도로 빨치산의 저항이 강하였다.

백아산 유격대는 미군 전폭기의 피습을 받아 다수의 병력을 잃은 후 약화되었다. 살아남은 병력은 지리산 등으로 이동하였고, 백아산에 잔존한 병력은 북면 지서, 원리 고지, 수리 고지 등에서 토벌대와 수차례에 걸쳐 접전을 벌여 사상자가 많았다.

[휴전 후의 유격 활동과 소멸]

백아산 일대에는 1953년 7월에 휴전이 성립된 이후에도 잔존한 부대의 유격 활동이 이어졌다. 휴전 후 빨치산 부대들은 장기적인 활동을 고려하여 사상 무장을 강화하고 부대를 소규모로 편성하여 운영하였다. 1954년 백아산 지구에는 전남 서부 도당, 백아산 지구당, 광주시당, 곡성군당, 곽용철 부대 등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54년 2월부터 3월 말까지 백야전 사령부의 토벌 작전이 실시되어 빨치산의 부대장, 위원장 등 많은 지휘관들을 사살하였고, 백아산의 유격 활동 역시 약화되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백아산 토벌 작전은 5년의 세월을 소모했고, 물자와 인명의 피해가 극심했던 전투였다.

백아산은 빨치산과 토벌대 그리고 지역 주민에게 고통과 좌절을 안긴 슬픔의 무대였다. 2003년부터 백아산 철쭉제와 함께 6·25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가 진행되고 있다.

[의의]

빨치산 투쟁은 기본적으로 미군과 한국 정부의 좌익 탄압의 결과로 발생한 수세적 투쟁이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총공세 등은 북한 지도부의 군사적 모험주의의 소산으로써 남한 내의 좌파 정치 역량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