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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476
한자 百濟復興運動
이칭/별칭 백적의 난(百賊─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문안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236년 - 이연년 형제 금성산성에서 거병, 백제 부흥 운동 시작
종결 시기/일시 1237년 - 백제 부흥 운동 종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이연년|김경손|최항

[정의]

고려 후기 무신 정권의 수탈에 대항하여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일어난 민란.

[역사적 배경]

백제 부흥 운동은 전라남도 담양 지역 출신의 이연년(李延年) 형제가 1236년 10월에 산림(山林)의 무리들을 모아 지금의 담양군 금성면 금성리에 있는 금성산성(金城山城)에서 거병하면서 일어났다. 이연년 형제가 거병한 시기는 몽골의 제3차 침입[1235년~1239년(고종 22~26)] 기간으로 고려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던 시기였다.

이연년 형제가 중심이 된 백제 부흥 운동은 강화 천도(江華遷都) 이후 누적된 내륙 지역의 피해와 팔만대장경 조판 사업 및 수탈의 폐단 때문에 일어났다. 당시 무신 정권의 집정자인 최이(崔怡)의 아들 최항(崔沆)[초명 만전(萬全)]은 지금의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위치한 쌍봉사에 거주하면서 각지의 농장 경영을 통해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몽골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백성들을 수탈하는 정권의 행태에 백성들의 적개심이 생겨났고, 백제 부흥 운동은 이에 편승하여 일어났다.

[경과]

최씨 정권은 몽골의 침략에 대한 대책으로 백성들에게 산성 입보를 지시했다. 몽골의 군대가 전라도 지역으로 향할 무렵 금성산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입보한 상태였다. 이연년 형제는 금성산성에서 거병한 후 인근 주현에 격문을 띄우며 민란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격문의 효과는 커서 인근 지방에서 많은 동참자가 모여들었다. 이연년 형제는 세력이 커지자 금성산성을 나와 지금의 광주 지역인 해양(海陽)으로 진격하면서 백제 도원수(百濟都元帥)를 자칭했고, 주변의 주현(州縣)을 수중에 넣고 세력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 전라남도 화순 지역 역시 이때 백제 부흥군의 수중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연년 형제는 해양을 점령한 후 나주로 향했는데, 이때 백제 부흥군은 수적으로 관군을 압도하였다. 나주에는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귀주성을 지켰던 김경손이 있었다. 이연년 형제는 몽골과의 항쟁에서 승리하여 신망이 높던 김경손을 끌어들여 부흥 운동의 지도자로 추대하고자 하여, 김경손을 사로잡기 위해 활을 쓰지 못하게 했다. 그 틈을 타 1237년(고종 24) 김경손이 직접 별초(別抄) 30명을 이끌고 돌진하여 이연년 형제를 살해하였다. 이연년 형제가 살해된 후 백제 부흥 운동은 종말을 고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연년 형제의 백제 부흥 운동은 비록 실패하기는 하였으나 경주에서 일어난 신라 부흥 운동 및 서경에서 최광수(崔光秀)가 일으킨 고구려 부흥 운동 등과 더불어 무신 정권의 가혹한 통치에 맞서 새로운 사회 질서 구축을 도모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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