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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496
한자 丁酉再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문안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7년 - 정유재란 발생

[정의]

1597년 임진왜란 중 화의 교섭 결렬로 왜군이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을 다시 침입한 전쟁.

[개설]

임진왜란조선의 강력한 저항과 명(明)의 원군으로 인해 전쟁이 장기화되자 왜군은 화의가 진행되고 있는 틈을 타서 본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의가 결렬되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면서 정유재란이 발생하였다. 전라도 지역은 이전과 달리 왜군의 직접적인 침입을 받게 되어 큰 피해를 입었고, 화순 지역에서는 왜군의 침입과 약탈에 맞서 곳곳에서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역사적 배경]

왜군은 1596년(선조 29) 9월 화의 교섭이 깨어지자 조선을 다시 침략하였다. 다음 해인 1597년 3월 중순 무렵부터 차례로 15만에 이르는 대군이 건너왔다. 조선도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경상도의 금오산성(金烏山城)·공산산성(公山山城)·화왕산성(火旺山城)을 비롯하여 각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대비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명의 원군 5만 5000명 역시 양호(楊鎬)를 경리(經理)로 삼고,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삼아 출정하였다.

1596년 12월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부대가 부산에 상륙하고, 이듬해 1월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군이 다대포(多大浦)에 상륙하여 양산(梁山)을 함락하고 서생포(西生浦)에 진을 쳤다. 왜군은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경상도·충청도·전라도를 완전히 점령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왜군은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워 7월 말부터 좌군은 남해(南海)·사천(泗川)·고성(固城)·하동(河東) 방면에서, 우군은 광양(光陽)·순천(順天)·김해(金海)·창원(昌原) 방면에서, 가토군은 밀양(密陽)·초계(草溪)·거창(居昌) 등을 거쳐 각기 전주로 향하였다. 화순 지역을 비롯한 전라도 일대는 왜군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경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잔학상에 대하여 강항(姜沆)[1567~1618]은 『수은집(睡隱集)』에서 “정유재란에 풍신수길(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여러 왜장들에게 명하여 코를 베는 것으로 수급을 대신하였으므로 왜졸들은 아국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빈번히 죽이고, 그 코를 베어 이것을 소금에 담아서 보냈다”라고 기록하였다. 유성룡(柳成龍)[1542~1607]도 『징비록(懲毖錄)』에 “이때 적이 삼도를 짓밟아 지나가는 곳마다 모두 분소하고 백성을 살육하였으며, 무릇 아국 사람을 보기만 하면 모조리 코를 베어서 공으로 삼고 겸하여 시멸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전라도 백성들이 모두 피난을 떠나야 했고 산하가 온통 불탔다. 전라도 지역은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의 침범을 피할 수 있었으나 정유재란 때는 초토화되고 말았다. 화순현 역시 정유재란의 참화를 입고 현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 한때 능성현에 소속되기를 민원으로 청할 만큼 큰 고통을 겪었다.

화순 지역에 왜군이 침입한 것은 1597년 7월 말부터이며 순천과 보성 방면에서 침입해 왔다. 왜군이 모후산의 산록을 거쳐 동복 지역으로 진출하자, 박광전(朴光前)[1526~1597]이 송홍렬(宋弘烈)·박사길(朴士吉) 등과 함께 적벽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박광전 의병 부대의 승전으로 왜군은 일시 순천 지역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왜군은 다시 동복현으로 내습하여 유린한 후 화순현을 침입하였다. 왜군의 약탈과 참화를 피해 최경운(崔慶雲)이 격문을 띄우고 향민과 가솔 노비 등 500여 명과 함께 오성산성에 올라 항전을 벌였으나 오성산성이 함락되면서 200여 명의 향민이 산화하였다.

한편 보성 방면에서 침입한 왜군은 능성현 외곽에 위치한 예성산성에 육박하였다. 이에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의 막하에서 싸웠던 김대인(金大仁)[?~?]이 거사(居士) 김명철(金命哲) 및 향민과 함께 식량과 군비를 갖추고 완강히 대항하였다. 왜군은 장기간 산성을 포위하고 있으면 식량과 식수의 고갈로 스스로 항복할 것으로 여겨 장기전을 펼쳤으나, 김대인의 기습과 완강한 항전이 계속되자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퇴각하였다.

[의의와 평가]

정유재란은 화순 지역에 혹심한 피해를 주었으나, 왜군의 공격과 수탈에 직면하여 굴하지 않고 양반 유생과 향민들이 자발적으로 의병 항쟁에 참여하였다. 이를 반영하듯이 『화순 읍지』·『능주 읍지』·『동복 읍지』 등에는 정유재란과 관련된 열녀·효자 등의 기사가 많이 실려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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