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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민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01
한자 壬戌民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문안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62년 - 임술민란 발생

[정의]

1862년 전라남도 화순 지역 인근을 포함한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농민 항쟁.

[개설]

1862년(철종 13) 2월 4일 단성현에서 일어난 민란을 시작으로 그 해 말까지 37차례에 걸친 민란이 일어났다. 전라도는 3월 27일 익산 지역을 시작으로 4월과 5월에 집중적으로 민란이 발생하였는데, 함평·고산·부안·금구·장흥·순천·강진 등 54개 군현 가운데 38여 곳에서 항쟁이 일어났다. 지금의 화순 지역에 해당하는 화순현동복현능성현 일대에서는 봉기가 일어났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화순 지역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분위기에 놓여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적 배경]

임술민란이 일어난 주된 원인은 환곡제의 문란과 관리들의 탐학 등 삼정 문란(三政紊亂)에 있었다. 또한 생산력의 발달과 토지 및 부의 집중에 따른 농민의 분화와 몰락, 신분제의 붕괴 및 민중 의식의 성장 등 조선 후기 일련의 사회 경제적 변화가 있었다. 민란은 몰락 양반이나 전직 관리가 주도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농민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특히 초군(樵軍), 즉 빈농이나 땅을 갖지 못한 농민들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민란이 3~5월의 춘궁기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사실은 민란의 발생이 생존권을 얻기 위한 항쟁이었음을 말해 준다.

[경과]

임술민란 초기에는 향회를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민(民)이 참여하는 경우와 민들이 논의를 제기해 각 마을에 통문을 돌린 후 새로운 논의 기구를 만들어내는 경우로 나뉘었다. 고을 수령과 감영에 청원하는 등장(等狀)을 내자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시위를 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하자는 쪽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양반들도 함께 모였다. 양반들은 농민들이 논의를 주도하면서 과격한 방향으로 진행되어 가자 중간에 빠져 나오게 된다. 등장을 제기하고 시위하기 위해 읍내로 들어온 농민들은 수령을 고을 경계 밖으로 쫓아냈고, 관아를 부수고 이서배들의 집을 불태우거나 죽이는 활동을 벌였다. 농민들은 시위하고 돌아가는 과정에 그 동안 괴롭혔던 토호 양반가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민란이 빈발하자 정부에서는 안핵사나 선무사를 급히 파견해 난을 수습하고 민심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탐관오리들의 비행을 밝히고 그들을 처벌하는 것보다 민란의 주모자를 체포·처형하는 데 힘을 쏟아 민심을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에서는 민란의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생각해 토지 제도 등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삼정을 바로 잡음으로써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결과]

정부는 농민 항쟁이 일어난 지역의 수령을 파직하고 항쟁 주모자의 처벌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5월 들어 봉기가 삼남 지역으로 확산되자 크게 위기 의식을 느끼고 봉기 주모자를 먼저 참수하고 보고하도록 하는 강경책으로 선회하였다. 또한 조세 문제가 수령 개인의 탐학, 어떤 한 고을만의 문제가 아님을 인정하고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을 설치하여 제도적인 개혁을 시도하였다.

[의의와 평가]

임술민란은 주로 고을 단위로 고을의 조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수령에게 청원하거나 시위하는 형태 등으로 전개되었다. 항쟁의 초기 단계부터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 모의하고 주도한 경우가 많았으며 요구도 구체적이었다. 농민들이 자신들의 처지에서 당시의 조세 수취 제도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했던 점은 정치적 주체로서 스스로 각성하고 단련해 가는 과정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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