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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08
한자 丙寅洋搖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조광철

[정의]

1866년 프랑스가 조선의 문호 개방을 요구하며 침략함으로써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체에 영향을 미친 사건.

[역사적 배경]

철종 재위 연간에 천주교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지자 프랑스 신부들은 조선에 밀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강화하였다. 1861년(철종 12) 신자 수는 1만 8000명, 1865년(고종 2)에는 2만 3000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1866년(고종 3) 1월 흥선 대원군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고 수개월 동안 프랑스 신부들을 비롯해 약 8,000명의 신자를 학살했다. 이 때 탈출한 프랑스의 리델 신부가 중국 텐진[天津]의 프랑스 극동 함대에 이 사실을 보고했고, 이를 빌미로 1866년 8월 프랑스 함대가 인천을 거쳐 양화진과 서강으로까지 진입하여 한성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경과]

병인양요 소식을 접한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지역 유림들은 김인기(金仁基)경주 김씨 집안을 중심으로 창의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양요가 생각 밖으로 일찍 종료됨에 따라 실제 병력을 규합하지는 않았다. 이때의 일을 기리기 위해 1867년(고종 4) 11월 경주 김씨 집안에서는 춘양면 가봉리의 호미산에 모의정(募義亭)을 건립했다. 모의정은 훗날 퇴락하여 1988년 가봉리 601번지에 복원되었으나 지금은 복원되었던 정자마저 사라진 상태이다.

[결과]

병인양요조선의 대외 경각심을 더욱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라남도에서는 이를 계기로 1867년(고종 4) 6월 순천 진영이 복설되었다. 또한 1871년(고종 8)에는 다시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연안을 낀 전라남도 지역에 대한 방비를 강화해 연차적으로 포군을 증원 배치했다. 화순 지역은 비록 연안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었음에도 포군이 증원 배치되었다. 1873년(고종 10) 2월에 화순현에는 별포수 20명이 배치되었고, 8월에는 동복현에 포군 20명을 두었다.

[의의와 평가]

병인양요를 비롯하여 1860~1870년대에 거듭된 양요는 지역 내 위정척사 사상을 강화시켰다. 특히 화순의 남서부 지역인 능주 일대에서 이러한 분위기가 두드러졌다. 이는 능주의 학풍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당시 위정척사 사상의 핵심 인물인 기정진(奇正鎭)[1798~1879]의 문인 594명 가운데 39명이 능주에 있었던 것이다. 능주와 인접한 지금의 나주시 남평면·다도면 지역에 세거해 온 풍산 홍씨 집안에도 기정진의 문인이 많아 능주 일원에서는 위정척사 사상의 확산에 상승 효과가 일어났다. 위정척사 사상은 1890년대 중반 서양와 왜를 동일시하면서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 운동에까지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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