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남한 대토벌 작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09
한자 南韓大討伐作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조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9년 9월 - 남한 대토벌 작전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09년 10월 - 남한 대토벌 작전 종결

[정의]

1909년 일본군이 약 2개월에 걸쳐 화순 지역을 비롯한 전라남도의 의병 활동을 진압할 목적으로 실시한 대규모 군사 작전.

[개설]

통상 남한 대토벌이라 불리는 일본군의 군사 작전은 실제로는 전라남도 지역을 겨냥한 작전이었다. 작전은 1909년(순종 3) 9월부터 10월까지 2개월에 걸쳐 진행되었고 일본 정규군 2개 연대가 투입되었다. 이 작전으로 전라남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은 심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후 국내에서의 대규모 항일 무장 투쟁은 궤멸되어 광복 때까지 재현되지 못하였다.

[역사적 배경]

항일 운동은 동학 농민군의 주요 슬로건이었고 실제 동학 농민군과 일본군의 소규모 접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1895년(고종 32)부터 항일 의병이 기치를 들고 활동을 시작했다. 여기에는 영향력이 큰 양반들이 주도하였고 대개 대한제국 군대와의 교전이 많았다.

러일 전쟁 이후에는 전황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907년(순종 즉위년)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으로 촉발된 중부 지방의 의병 운동이 일단락되었다. 반면에 호남 지역의 의병 운동은 오히려 강화되는 양상을 띠었다. 1909년 당시 일본군은 전국의 의병을 3만 8000여 명으로 추산했는데 그 중 1만 7000여 명이 전라남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전라남도 지역의 의병 운동이 지속적으로 강화된 데는 의병의 출신지와 활동 근거지가 거의 일치하여 지역적 기반이 탄탄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군으로서는 진압을 위한 대규모 병력 동원이나 철도 같이 이동에 필요한 기반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이전까지의 진압이 대부분 분산적으로 이루어진 데 따른 결과였다. 산악 기동을 주로 하는 의병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에 일제는 호남 지역 의병을 강제 병합의 마지막 장애물로 판단하고 대규모 정규군을 동원해 이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경과]

당시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조직과 규모, 활동성이 강한 몇 개의 의병 부대들이 1909년 3월부터 편성되어 활동을 재개했다. 특히 노령산맥 일대에서는 전해산(全海山), 영산강 동쪽과 남해안 일대에서는 심남일(沈南一)[1871~1910], 동부 산악 지대에서는 안규홍(安圭洪)[1879~1911]이 이끄는 부대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에 일본군은 1909년 9월부터 정규군 2개 연대, 병력 수로는 약 2,000명을 투입하여 작전을 펼쳤다. 이밖에도 헌병대와 경찰, 조선인 밀정 등 다른 무력 세력도 진압에 동원되었다.

작전은 서해의 변산 반도에서 노령산맥을 거쳐 남원에 이르고, 다시 섬진강을 따라 하동군을 잇는 봉쇄선을 설치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여기서 2개 일본군 연대는 영산강을 기준으로 하류 쪽으로 남하하면서 의병을 압박했는데 제1연대는 영산강을 따라 상류에서 하류 쪽으로, 제2연대는 섬진강에서 동부의 산악 지대를 거쳐 영산강으로 향하는 축선을 따라 진격했다. 한편 일본군은 전라남도 연안의 해상에 수뢰정을 배치해 의병들의 해상 퇴로를 차단하기도 했다.

남한 대토벌 작전 직전까지 화순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의병 활동이 왕성했다. 1909년 1월에는 일단의 의병들이 화순의 헌병 분견대와 교전을 했고, 3~4월에는 군용품을 수집했으며 화순 일진회 회장의 가택을 습격했다. 7월에는 당시 동복군 사평리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대규모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때 참가한 의병의 수만 1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남한 대토벌 작전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당시 화순 지역은 일본군 제2연대의 작전 지구에 속했다. 이들은 현지 수비대와 합세해 진압에 착수했다. 대부분 의병들의 이동로를 뒤쫓거나 예상 이동로에 매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러한 일제의 대규모 군사적 압박에 화순 지역의 의병들도 전면적인 접전을 피하고 전력 보존을 위해 은신처를 자주 옮기거나 부대를 나눠 일본군의 봉쇄선을 뚫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남한 대토벌 작전 직전과 비교해 의병과 일본군 간의 실질적인 교전은 많이 줄어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결과]

남한 대토벌 작전 기간에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의병장 100여 명이 체포되었고, 의병 4,000여 명이 체포되거나 숨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의병장 심남일과 안규홍은 1909년 10월에 붙잡혔고, 12월에는 전해산이 붙잡혔다. 특히 영산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심남일과 그의 선봉장 강무경(姜武景)[1878~1909]은 1909년 10월 능주에서 장흥으로 넘어가는 바람재 고개[풍치(風峙)][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 이만리와 장흥군 유치면 대천리 사이]에서 일본군 제2연대 및 제3중대와 접전을 벌이던 중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1910년(순종 4)과 이듬해에 각각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포로가 된 의병 중 300~600여 명은 토목 사업에 동원되었다. 해남에서 하동에 이르는 지금의 국도 2호선에 해당하는 일부 구간의 기본 골격이 당시 노역에 징발된 의병들이 건설한 것이다. 일제는 이를 ‘폭도 도로’라고 불렀다.

[의의와 평가]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은 큰 타격을 입었고 한동안 저항 운동의 중심이 사라졌다. 화순 지역 3·1 운동의 분산적인 전개가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화순 지역의 항일 운동은 3·1 운동을 제외하고는 1910년대의 침체기를 거쳐 1920~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사회·청년·농민·노동자 운동의 형태로 재편되어 재개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