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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1054
한자 義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문안식

[정의]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조선 시대와 개항기에 국가가 위급할 때 백성들이 스스로 조직한 자위군.

[임진왜란 의병]

조선 시대 화순 지역 최초의 의병 운동은 1592년(선조 25)에 일본군의 침입으로 시작된 임진왜란 때에 일어났다. 임진왜란은 7년간이나 계속되어 참혹한 피해를 조선에 입혔다. 조선의 관군은 임진왜란 초기에 연전연패를 거듭하였고, 전라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군과 맞섰다.

화순 지역 역시 의병이 일어났으며, 지휘자는 최경회(崔慶會)였다. 최경회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최경운(崔慶雲)·최경장(崔慶長)과 함께 고을 사람들을 효유(曉諭)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문홍헌(文弘獻) 등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고,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규합하여 ‘전라 우의병’을 조직하였다.

최경회가 이끈 의병 부대는 금산과 무주에서 전주·남원으로 향하는 일본군을 장수에서 막아 싸웠다. 또한 금산에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우지치(牛旨峙)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최경회는 공로를 인정 받아 경상 우병사에 임명되었고, 1593년 6월 가토[加藤淸正] 등이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여 오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 병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였다. 최경회는 진주성이 9일 만에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화순 지역은 정유재란 때에도 의병 항쟁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후 화순 일대에 왜군이 침입한 것은 1597년 7월 말 무렵이다. 전라도 일대는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극심한 피해를 당하였다. 화순 역시 왜군의 침입을 받아 갖은 횡포에 시달렸다.

왜군이 화순 지역으로 침입하자 박광전(朴光前)은 송홍렬(宋弘烈) 및 박사길(朴士吉) 등과 함께 동복 적벽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박광전 의병 부대의 승전으로 왜군은 일시 순천 쪽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왜군은 다시 승주 방면에서 동복현으로 내습하여 유린한 후 화순현 방면으로 침입하였다.

왜군의 약탈과 참화를 피해 화순현 사람들은 의병장 최경운[최경회의 장형]과 함께 의병 운동을 전개하였다. 최경운은 각처에 격문을 띄우고 향민 가솔 노비 등 5백여 명과 함께 오성 산성에서 항전을 벌였다. 최경운 의병 부대는 향토를 수호하겠다는 충천하는 적개 일념으로 왜병 3,000여 명과 처절한 혈전을 3주야 동안 계속하였다. 오성 산성이 함락되면서 최경운은 2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산화하였다. 산정에는 진사 최공 경운 전망 유허비(進士崔公慶雲戰亡遺墟碑)가 남아 있다.

한편 보성 방면에서 침입한 왜군은 능성현의 외곽에 위치한 예성산성으로 육박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싸웠던 김대인(金大仁)이 거사(居士) 김명철(金命哲)과 더불어 향민을 모아 식량과 군비를 갖추고 완강히 대항하였다. 왜군은 장기간 산성을 포위하고 있으면 식량과 식수의 고갈로 스스로 항복할 것으로 믿고 장기전을 펼쳤다. 왜군은 김대인의 기습 작전과 완강한 항전이 계속되자 무수한 사상자를 남기고 퇴각하였다.

[병자호란 의병]

화순 지역의 유림과 향민들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의병 항쟁의 대열에 적극 참여하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어 사정이 급박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화순을 비롯한 전라도 일원에서는 의병이 조직되었다. 옥과 현감 이흥발(李興渤), 대동 찰방 이기발(李起渤), 전 한림 양만용(梁曼容), 전 찰방 유즙(柳楫) 등이 앞장서서 의병을 규합하였다. 이들은 모의청(募義廳)을 설치하고 도내에 격문을 보내는 한편 여러 고을에 모의 유사(募義有司)를 정하기도 하였다.

화순 지역은 조수성(曺守誠) 등이 중심이 되어 의병 부대가 조직되었다. 조수성은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학문이 정미(精微)하고 언행이 독실하여 집에 있을 때에도 법도가 있었다. 조카 조황(曺熀) 및 최명해(崔鳴海)·임시태(林時泰) 등과 창의하여 격문을 사방에 돌려 병사와 군량(軍粮)을 모집하였다. 조수성은 도대장(都大將)에 추대되어 의병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전라 의병은 여산(礪山)에 모여 남한산성을 향하던 중 청주에서 적과 화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한말 구국 항쟁과 쌍산 의병]

화순 사람들은 한말(韓末)에 이르러서도 일제에 맞서 구국 항쟁을 벌였다. 한말의 의병 항쟁은 크게 3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다. 1차 의병[을미 의병]은 1895년 10월과 12월에 각각 자행된 명성 황후 시해[을미사변]와 단발령 등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라도의 1차 의병은 장성과 나주를 중심으로 1895년 겨울부터 준비되어, 1896년 2월 아관파천 직후에 1달 동안 전개되었다.

전라도 지방에서 2차 의병의 봉화는 1906년 4월 최익현에 의해 올려졌다. 최익현임병찬 등과 태인 무성 서원에서 집회를 개최한 후 정읍과 곡성 등을 거쳐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최익현의 의병은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 군인들과 충돌에 이르렀다. 최익현의 봉기는 미미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호남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전쟁의 도화선 구실을 하였다.

고광순백낙구, 양한규, 양회일 등이 중심이 되었다. 고광순은 담양 창평 출신으로 최익현이 체포된 후 남원의 양한규와 연합 전선을 펼쳐 남원읍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화순의 능주와 동복 및 구례·광양·순천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화순을 비롯한 호남 지역에서 의병항쟁의 전환점이 마련된 것은 1907년 기삼연의 장성 봉기이다.

기삼연은 부대의 명칭을 ‘호남 창의 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 하였으며, 시위적 성격을 벗어나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호남 지역의 의병전쟁은 일제의 이른바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이 실시될 때까지 전성기를 이루었다. 화순 지역 의병 전쟁의 중심지는 이양면 계당산의 ‘쌍산 의소’였다. 쌍산 의소는 1907년에 양회일과 임노복 및 임상영, 안찬재 등이 주축이 되어 구성하였다.

쌍산 의소는 무기 및 탄약을 공급하는 무기 제작소와 유황의 저장고인 유황굴, 방어를 위한 의병성(義兵城) 등이 마련되었다. 쌍산 의소는 다수의 의병들이 주둔한 채 스스로 무기를 만들어가며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쌍산 의소의 의병들은 능주를 중심으로 동복 및 화순 일대에서 왜적과 격전을 치렀다. 이 의병 활동은 1908년에 들어 일제의 토벌이 강화되어 주요 의병장들이 전사하면서 침체를 겪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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