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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탄광 파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37
한자 和順炭鑛罷業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6년 10월 30일연표보기 - 화순 탄광 파업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46년 11월연표보기 - 화순 탄광 파업 종료
발생|시작 장소 화순 탄광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충의로 1064[복암리 893-3]지도보기
성격 사회 운동

[정의]

1946년 10월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 탄광의 광부들이 식량 배급량과 인금의 인상을 요구하며 일으킨 파업.

[개설]

화순 탄광 파업은 1946년 대구에서 일어난 이른바 ‘10월 폭동’과 발생 시기가 겹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화순 탄광 파업 이후 미군정과 경찰, 그리고 우익 세력은 파업을 주도한 좌익 성향의 조선 노동조합 전국 평의회[약칭 전평]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역사적 배경]

1. 화순 탄광의 역사

화순 탄광화순군 동면 복암리 일대에 있었다. 원래는 종방 탄광과 남선 탄광 등 각기 다른 일본인 소유의 탄광들이었다. 1930년대 초엽부터 본격적으로 채굴을 시작했는데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철수하며 탄광이 무주공산(無主空山)과 다름없게 되자 광부들이 자체적으로 탄광 시설을 관리했다. 광부들이 자체적으로 탄광을 관리하던 체제는 1945년 11월 미군이 도착하며 종식되었다. 미군정은 종래의 종방 탄광과 남선 탄광을 일원화해 화순 탄광이란 이름으로 통합했다.

당시 화순 탄광은 삼척 탄광·영월 탄광·음성 탄광과 함께 채탄량이 많은 4대 탄광으로 꼽혔다. 화순 탄광의 석탄은 주로 서울 등 대도시의 가정용 연료뿐 아니라 광주 지역 소재의 전남 방직 공장의 연료로 공급되어 면직물 생산에도 영향을 줄 만큼 비중이 컸다.

2. 광부들의 생활고

화순 탄광에는 광부 1,700여 명이 일했고 가족까지 포함하면 약 5,000여 명이 화순 탄광에 의존해 생활했다. 하지만 미군정 초 광부들은 높은 식량 가격에 비해 저임금에 시달렸고, 식량 거래를 전적으로 자유 시장에 맡겼던 미군정의 초기 정책은 광부들의 생활고를 더욱 부채질했다. 이에 1946년 2월 정책을 바꿔 일제 말의 식량 배급제를 부활시켰고 이에 따라 광부들은 식량과 현금으로 임금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노동 강도에 비해 여전히 배급량이 적고 임금도 낮은 수준이라는 것이 당시 광부들의 입장이었다. 이 문제는 1946년 내내 화순 탄광 광부와 미군정 간의 쟁점이 되었다.

3. 정치 상황

미군정이 운영권을 인수한 1945년 11월 화순 탄광에서는 전평 계열의 노동조합이 창설됐다. 초기 전평계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고 하지만 노동 운동이 조직화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1946년 8월 광주 지역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광복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려던 광부들이 광주 지역과 화순 지역 경계인 너릿재 고개를 넘으려던 중 미군정과 충돌한 사건은 이런 와중에 발생했다. 같은 달 소련 군정 치하의 북한 지역에서는 돌연 석탄 공급을 중단하는 일도 있었다. 북한의 석탄 공급 중단으로 인해 남한의 석탄 수급에 차질을 빚으면서 광부들의 입장이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0월에는 전라남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좌익이 주도하는 크고 작은 무장 봉기들이 발생했다.

[경과]

화순 탄광에서는 1946년 10월 30일에 전평 주도로 파업을 시작했다. 공식적인 파업 사유는 식량 배급과 임금의 인상이었다. 이외에 강압적인 경찰의 편파적 운영도 파업의 이유 중 하나였다.

파업은 10월 31일 화순군 농민, 민주 학생 연맹 계열의 학생들까지 참여하여 참가규모 2,000~3,000명에 달하는 호응 시위로 발전했다. 파업 초기에 일시적으로 미군정과 전라남도 당국, 그리고 광부들 간에 타협의 조짐도 있었으나 타협은 실패했고 파업은 10월 내내 계속됐다.

탄광은 파업으로 인해 한 달 동안 조업을 중단했고 미군정은 정치적 혼란뿐 아니라 석탄 수급의 차질이라는 복합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이에 11월 3일과 4일 사이에 미군 방첩대와 경찰은 노동조합을 급습했다. 이 때 지도부 5명이 체포됐으나 호송 과정에서 이를 제지하는 광부들과 유혈 충돌을 빚었다. 이후 11월 6일에도 대규모 검거가 있었다. 이러한 파업 진압으로 노동조합은 결집력을 잃었고 11월에 파업은 일단락됐다.

[결과]

화순 탄광의 파업을 겪은 전평 계열의 노동조합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미군정은 우익과 합세해 1946년 12월부터 전평의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했고 이듬해 7월 우익 성향을 가진 대한 독립 촉성 노동 총연맹[약칭 노총]의 산하 노조가 화순 탄광에 공식 출범했다.

이후 전평의 영향력은 1947년 5월의 메이데이 사건으로 표출되기도 했지만 1946년처럼 파업을 주도할 만한 수준으로는 회복되지 않았다. 화순 탄광에서 식량난과 저임금 등의 고질적인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 남아 노총 주도의 탄광에서도 1960년대까지 파업이 계속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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