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정자근노미 효행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750
한자 鄭者斤老味孝行碑
이칭/별칭 정효자비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489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희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26년연표보기 - 정자근노미 효행비 창건
보수|복원 시기/일시 1855년 - 정자근노미 효행비 중건
이전 시기/일시 1985년 - 정자근노미 효행비 이건
현 소재지 정자근노미 효행비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489 지도보기
원소재지 정자근노미 효행비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보산리 보암 마을
성격 효행 기적비
양식 석비
관련 인물 정자근노미(鄭者斤老味)
재질 석재
크기(높이,너비,두께) 150㎝[총 높이]|120㎝[총 높이]|50㎝[너비]|16㎝[두께]
소유자 정씨 문중
관리자 정씨 문중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에 있는 효행 기념비.

[개설]

정자근노미는 어머니가 병석에 눕게 되자 간절히 기도하여 겨울에 강에서 잉어를 구하고, 복숭아를 구하는 등 온갖 정성을 쏟았는데, 그 효행이 알려져 정려를 명하였다고 하며, 효행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기록상으로는 조선 후기 관찬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1759]에서 처음 확인 되는데, 잉어와 복숭아가 관련된 효행의 내용, 호역의 면제[給復], 비석 건립[立碑] 사실이 나온다. 『동복현 읍지』[1895]에는 정려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건립 경위]

정자근노미(鄭者斤老味) 효행비는 원래 1726년(영조 2)에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보산리 보암 마을에 건립하였고, 1855년(철종 6) 1월에 중건하였다. 보암 마을은 조선 시대에 전라도 동복현 내서면 보암리였다. 동복댐 공사로 원래 자리가 동복호 수몰 지구로 들어가자 1985년 10월에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로 옮겼다.

[위치]

정자근노미 효행비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화순 군청 소재지에서 15㎞ 거리에 있다. 화순읍 수만리, 이서면 안심리를 지나 이서 면사무소 앞 적벽로를 따라 가다 600m 지점의 야사제1교 앞에서 싸리재 방면으로 150m 거리에 있는 ‘병암하선생천(屛巖河先生阡)’ 비석이 있는 곳에서 야트막한 산길로 접어들어 오른쪽 벽돌조 제각 건물 옆 보호책 안에 있다.

[형태]

호패형의 일반형 석비로 윗부분 모서리를 약간 다듬은 형태이다. 총 높이 150㎝, 비몸 높이 120㎝, 너비 50㎝, 두께 16㎝이다. 앞면 가운데에 비제를 새기고 오른쪽에 건립 연기를 새겼는데, 처음 건립과 중건 연대 등 2회의 건립 연대가 표기 되어 있다.

[금석문]

앞면 가운데에 내려쓰기로 ‘효자정자근노미비(孝子鄭者斤老味碑)’라 음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오른쪽[향우]에는 ‘옹정 병오 창립 함풍 을묘 정월 중건(雍正丙午刱立 咸豊乙卯正月重建)’이라는 연기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조선 후기 관찬 지리지인 『여지도서』[1759]에 ‘정자근노미는 양인이다. 부모를 섬기는 데 효성을 다하였고, 어머니가 병이 들어 겨울에 잉어를 생각하자 울면서 강의 얼음을 쪼개니 잉어가 놀라 스스로 나왔다. 또한 눈이 오는 가운데 복숭아를 찾으매, 강가 나무 아래에서 구하니 복숭아가 땅위에 있어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려 병환을 치료하게 되었다. 이 일이 알려져서 호역을 면제받고 비를 세우게 되었다[鄭者斤老味 良人 事母至孝 母病冬月思鯉 哭剖江氷 鯉自躍出 又雪中思桃 泣求樹下桃在地上 取以供母 母病立愈 事 聞給復立碑]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어 『동복현 읍지』[1895]에는 ‘정자근노미는 부모를 섬기는 데 효성을 다하였고, 어머니가 병이 들어 겨울에 잉어를 찾으시매, 울면서 강의 얼음을 쪼개니 잉어가 놀라 스스로 나왔다. 또한 눈이 오는 가운데 복숭아를 생각하매, 강가 나무 아래에서 울면서 구하자 복숭아가 땅위에 있어 어머니께 가져다 드려 병이 빨리 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를 명하였다[鄭者斤老味 事父母至孝 母病冬月思鯉 哭剖江氷 鯉自躍出 又雪中思桃 泣求樹下桃在地上 取以供母 母病立愈 事 聞旌閭]라는 내용이다.

『여지도서』에서 ‘양인(良人)’이라는 신분이 표기되어 있는데, 효자의 이름도 ‘자근노미’라는 이두식 표현임을 볼 때 낮은 신분임을 알 수 있다. 『동복현 읍지』에서는 그전에 호역이 면제되고 입비[給復立碑]가 될 정도로 이미 국가 포장이 있었기 때문에 신분 명시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구전되는 내용으로는 잉어, 복숭아 관련 일화와 함께 한 가지가 더 전해 온다. 어머니의 병환이 나은 뒤부터 정 효자는 적벽을 어머님의 병을 낫게 해 준 고마운 산이라 하여 이 산을 찾을 때마다 예를 올렸다. 그러다가 또 다시 어려움이 닥쳐왔는데 어머니가 마을 앞에서 실족하여 익사했던 것이다. 정 효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자신의 불효 탓이므로 낯을 들고 다닐 수 없다 하여 어머니가 익사한 곳에서 투신하고 말았다. 이튿날 모자는 물위에 떠올라 주민들이 고소대에서 탑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장사지내 주었다. 장사를 지낸 지 몇 해가 지나 동복 현감이 말을 타고 순시중 이 묘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말이 움직이지 않았다. 말에서 내린 현감은 무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전에게 물으니 보암 마을에 살던 정 효자 모자의 묘인데 돌보는 이가 없다 하였다. 현감은 무덤 앞으로가 제사를 지내 줄 것을 약속하였더니 비로소 말이 움직였다고 한다. 현감은 보암리에 제답으로 2마지기를 마련해 주고 매년 제를 지내 줄 것을 분부하였다. 이후부터 주민들은 음력 3월 3일이면 정 효자 모자제를 지내오고 있었다.

[현황]

정자근노미 효행비는 1985년 현 위치로 옮겨 벽돌조 제실[사당]을 건립하고 제를 지내고 있다. 제실 한 켠 담벽을 배경으로 비를 세우고 앞에는 보호책을 설치해 보호하고 있다. 보호책 안에는 1985년 세운 정효자비[1985년 건립, 하태영 지음, 이규형 글씨]가 함께 있다. 소유는 경주 정씨 종중이다. 2003년 정효자 추모 사업 위원회가 결성되어 매년 한식에 제를 올리고 있다. 2008년에 남쪽 100m 지점에 제단[孝子鄭公祭壇]과 기적비[孝子慶州鄭公紀蹟碑, 장두석 지음, 이규형 글씨]를 건립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양인 신분 효자의 효행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효행비에 비의 건립과 중건 연대를 적고 있는 점도 의미가 있다. 화순 지역 향토학 현장 자료로서도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