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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리 창녕 조씨 집성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884
한자 壯東里昌寧曺氏集姓村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장동리 찰동 마을
집필자 최성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637년경 - 창녕 조씨 조엽 장동리 찰동 마을 입향
성격 집성촌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장동리 찰동 마을을 중심으로 세거하는 창녕 조씨 집성촌.

[명칭 유래]

찰동 마을은 고려 말 찰방을 지낸 최씨가 입향 거주함으로써 찰방골이라 하다가 찰동으로 되었다고 전한다.

[형성 및 변천]

구봉 조엽(曺熀)[1600~1665]을 입향조로 하여 이어오는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장동리창녕 조씨 집성촌이다. 1637년(인조 15) 무렵 조엽이 화순현 읍내 녹구리에서 동면 찰동 마을로 입향하여 정착하였다. 조엽조경중(曺景中)[1533~1584]의 손자이며 첨정 조수훈(曺守訓)[1561~1633]의 아들이다. 자는 회이(晦而)이고 호는 구봉(九峯)으로, 1624년 진사에 급제하였다. 성리학에 전심 노력하여 경전의 뜻을 밝혔으며 효행이 독실하고 지극해 여묘살이를 6년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시 종숙부 청강공 조수성(曺守誠)[1570~1644]이 창의할 때 함께 순국을 맹세하고 청주에 이르러 적을 9명 베고 말하기를 군사로서 창의할 때 죽음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면 족히 세상의 웃음거리밖에 안 된다 하고 청주로 더 나아갈 때 강화의 소식을 접하고 통곡하며 돌아와 구봉산 아래에 은거하였다. 백강 이경여(李敬輿)[1585~1657], 노봉 민정중(閔鼎重)[1629~1692] 등 여러 어진 분들이 서로 조정에 천거하여 감역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또 「삼학사 찬존주의록(三學士贊尊周義錄)」을 저술하여 그 절개와 의리를 밝히니 유최기(兪最基)가 그 묘에 쓰기를 ‘대명처사’라 하였다.

조선적[1650~1687]은 입향조 조엽의 손자이며 조정삼(曺挺三)[1620~1663]의 아들이다. 1736년 무과에 급제하여 병절교위 용양위 부사과를 지냈다. 조명옥(曺命玉)[1708~1768]은 조엽의 증손이며 조선춘(曺善春)[1674~1732]의 아들로 호는 악재(樂齋)이다. 효도하고 우애함이 높고 독실하니 향리에서 모두 감복하였다. 5세에 글을 지었고 10세에 문장을 이루어 1753년 성균관 시험에서 임금의 먹을 세 번 하사받아 장원으로 뽑히어 대궐에 입시하여 강론하니 임금이 감탄하여 대궐에서 빚은 술을 하사하였다.

조익현(曺翊鉉)[1737~1800]은 조엽의 현손이며 조수옥(曺粹玉)[1698~1751]의 아들로 호는 행정(杏亭)이다. 1717년 진사에 합격하였다. 문장으로 여러 번 고을에서 천거하였으며 『폐추록(蔽箒錄)』 4권이 있다. 조익은(曺翊殷)[1735~1807]은 조엽의 현손이며 조석옥(曺錫玉)[1708~1784]의 아들로 호는 만회재(晩晦齋)이다. 1723년에 생원에 합격하였다. 효행으로 여러 번 고을의 천거함이 있었다. 당시 벼슬한 사람과 문장들이 그 이름을 들은 자는 얼굴 한번 보기를 원하였다.

[자연환경]

찰동 마을은 동쪽으로 진터, 서쪽으로 시루봉밑, 숯굴터, 남쪽으로 누은등, 앞산, 화순천, 북쪽으로 콩재, 시루봉, 안골, 진터산, 쇠쟁이, 해냄등이 있다.

[현황]

2013년 현재 36가구 66명이 창녕 조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1946년 조기태(曺基泰)[1909~1984]가 어머니 은혜에 보답하고자 건립한 송암정(松岩亭)과 1989년에 건립한 증 통훈대부 사복시 정 구봉 조선생 창의 사적비가 있다. 1978년 건립한 구봉 조엽의 재실인 경모재(敬慕齋)가 있다. 1804년(순조 4) 정려를 하사받았는데, 정려는 늑정에 있다가 화순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광덕리 남산 아래로 이건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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