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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 마을 둘러보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A010000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숙희

[무등산 아래 맑은 하천이 흐르는 청정 야사 마을]

야사 마을은 깊은 산과 맑은 물 그리고 들녘이 어우러진 절경의 산골 마을이다. 서쪽으로는 1,000m가 넘는 무등산이 있고, 북쪽으로는 방아재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마을 뒤까지 이어진다. 남쪽으로는 마을 앞 이서천 너머가 별산 등성이고, 동쪽으로는 멀리 적벽산이 보인다. 이런 첩첩 산중이지만 맑은 하천이 넓은 들을 이룬다.

야사 마을이서천을 사이에 두고 가옥이 모여 있는 아리데미[아랫마을]와 이서천 건너 우데미[윗마을]로 이루어진다. 우데미에는 퇴적층인 보와들이 넓게 펼쳐져 논농사가 한창이다. 야사제1교를 건너면 아리데미이다. 동편 끝자락에는 진뱀이들이 길게 늘어져 있다. 예전에는 여기서도 논농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진뱀이들의 많은 부분이 물에 잠기고 마을 가까운 들녁에는 뽕나무 단지와 뽕나무 가로수가 이색적이다.

2013년 현재 야사 마을에서는 주민 100여 명 중에서 80%이상이 누에를 친다. 화순 최대의 잠업마을이라 할 만 하다. 1980년대에는 주민의 90%나 누에를 쳤다고 한다. 이렇게 누에를 많이 치니 대규모 뽕나무 밭이 필요하게 되었다. 마을 동쪽 진뱀이들 약 1.5ha이 뽕나무 밭으로 변했다. 야사 마을의 옛 이름 중 하나는 비단과 모래를 뜻하는 금사로 비단은 뽕나무와 누에를 뜻한다. 우리나라 양잠의 시작은 삼한시대 이전으로 그 역사가 깊다. 야사 마을의 양잠 역시, 800년이라는 마을 역사와 함께 했을 것이다. 잠업이 특화된 야사 마을에서 뽕가루를 넣어서 만든 ‘뽕엿’은 매우 인기 있는 마을특산품이다.

웰빙을 추구하는 오늘날, 야사 마을은 산수가 빼어난 좋은 자연환경 덕택에 청정 이미지로 높은 경쟁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청정 환경이 요구되는 잠업으로 윤택한 삶의 꿈이 실현되고 있다. 이렇게 야사 마을 주민들은 뽕나무 그리고 누에와의 오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800여년의 역사와 함께 하는 야사 마을]

전라남도는 2007년부터 ‘행복 마을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농촌 인구 유입 증대, 마을 공동체 복원, 농사 외 소득 증대, 일자리 창출, 한옥의 국내·외 홍보 등이 목적이다. 야사 마을은 2009년에 화순군 처음으로 행복 마을로 지정되었다. 또한 2011년 12월에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3호로 지정되었다.

이서천 위의 야사제1교로 올라서면, 마을 왼편 이서천변에 우람한 은행나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라의 국운과 화평을 울음소리로 알렸다는 신령스러운 고목이다. 화순 야사리 은행나무는 어른 댓 명이 양팔을 벌려야 잡을 수 있을 정도의 거목으로, 나이는 500살에서 800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랜 세월을 마을과 함께 지내다 보니, 나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무성했던 나무의 자태에서부터 나무에서 놀던 이야기, 마을에 경제적 이득을 준 이야기, 신령스럽게 마을사람을 지켜준 이야기 등 모두가 추억이며 역사이다.

야사 마을의 또 다른 명물은 폐교 운동장을 지키고 있는 나이가 400년이나 되는 쌍 느티나무이다. 2그루의 느티나무가 한 몸인 양 서로를 의지하며 빈 운동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런 신령스러운 나무들은 마을의 당산이 되어 매년 정월 열나흗날이 되면 야사 마을에는 800여년의 마을역사와 함께 당산제를 모신다. 야사 마을의 당산제는 맨 먼저 마을 안 ‘금사정터’라는 곳에 새로 심은 할아버지 당산나무인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에서 시작해서, 할머니 당산인 화순 야사리 쌍 느티나무,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을 입구의 화순 야사리 은행나무에서 마무리하게 된다. 당산제를 모시는 세 곳의 당산나무와 제장 주변에는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야사 마을, 호남 실학의 중심이 되다]

야사 마을은 조선 후기 실학자 나경적규남 하백원의 출신지로서, 실학 마을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나경적은 자명종과 기형혼천의 등을 제작하여 호남 실학의 역사를 선도하였다. 하백원은 창의적 사고로 오늘날의 양수기 기능을 하는 수차인 자승차를 연구 개발하였고, 「동국전도」와 「만국 전도」를 완성하여 호남 뿐만 아니라 야사리 실학의 역사를 빛내고 있다. 하백원의 선조인 금사 하윤구의 호를 따서 만든 금사정은 실학의 씨앗이 싹튼 시발지라 할 수 있다. ‘금사정’은 지금은 터만 남아 있지만 하윤구야사 마을에 거주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평생 지니고 살았던 우국충절의 마음이 남겨진 곳이다.

2011년 11월 하백원을 기리는 규남 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야사 마을은 실학역사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규남 박물관 길 건너에는 진양 하씨와 동복 오씨의 절의를 기린 쌍렬문과 충절노비인 목산의 비가 있다. 쌍렬문은 정려각 두 개를 한자리에 모아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야사 마을의 옛모습에 비추어 현재를 보다]

야사 마을 마을 회관에는 장수 마을 건강 관리실이 마련되어 있다. 장수 마을 건강 관리실에 크레파스로 엷은 색칠을 한 마을 지도가 걸려있다. 「1945년의 야사리 전도」라는 제목의 이 지도는 잊혀져 가는 마을에 대한 모습을 후대에 길이 남기고 싶어 1999년에 하장호 씨의 옛 기억을 옮긴 것이다. 지도는 1945년 당시의 마을 상황을 생생히 보여주는 채색 그림 지도이다. 주재소, 면사무소, 신사 터, 짐대 터, 학교뿐만 아니라, 가가호호에 거주하는 마을 사람들 이름까지 적어 놓았다. 야사제1교 아래의 왼편에 있는 강변은 1984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 재래시장인 이서장이 섰던 곳이다. 지도 왼쪽 아래 공간에는 1945년과 1999년 사이에 바뀐 주택 거주자 변동 사항까지 기록하고 있다. 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하장호 씨의 그림 지도를 보며 마을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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