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마을의 액을 몰아내는 마당밟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C020202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도장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옥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대 2010.02.28 - 전승이 중단되었던 지신밟기를 복원하여 연행
현대 2012.12.22 - 마을축제에서 도암농악단이 길굿을 침
마을지 농산물 가공 공장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원정 다닐 정도로 활발했던 도장 마을 매구패]

갠 갠 갠 갠지갠. 2012년 12월 22일 도장골 한마당 축제는 흥겨운 풍물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농악 복식을 갖춘 12명의 농악패가 길굿을 치며 대밑애길에서 해망산교를 지나 도장 마을 회관으로 들어왔다.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눈과 귀가 모두 농악패에게 집중되었다. 겨울바람 끝은 매웠지만 풍물소리와 농악패의 움직임에는 따뜻한 바람이 일었다. 풍물 소리로 힘차게 축제의 시작을 알린 이들은 도암 농악단[단장: 김명춘] 단원들이다. 도암 농악단은 도암면에서 풍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구성한 단체이며 2012년 현재 총 25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농한기 때 모여 풍물을 연습하며 도암면에 행사가 있을 때면 참여하여 행사 분위기를 돋우어 준다.

이번에는 도암면 농악단의 지원을 받았지만 도장 마을도 풍물이 활발한 마을이었다.

“예전에는 우리 마을 농악이 아주 세서 인접 마을까지 원정을 다니기도 했어요”(김성인)

김성인 씨의 말에 옆에 서 듣고 있던 김범순 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도장 마을마당밟이는 전승이 중단되었다.

“춘정 아재, 당촌 어르신, 형시호 씨, 형경열 씨, 김하해 씨. 상쇠는 경열 씨 그 양반이 잘 쳤지. 참말로 즐거움이 많은 양반들이었어. 참말로 그 양반들이 진짜 잘했제. 다 고인되시고 춘정 아재 혼자 남아계시네. 뒤를 이어받은 양반들이 별로 없제” (김성인)

[20여년 만에 마당밟이를 하다]

2010년 2월 28일 도장 마을에서 꽹과리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날은 음력으로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도장 마을에서 마당밟이가 중단된 지 20여년 만이다. 도장 마을에서는 마을에 젊은이들이 많이 살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마당밟이를 걸게 했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밥을 먹고 나면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마당밟이를 했는데, 길게 할 때에는 정월 대보름날부터 시작하여 10여일 이상 지속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의 인구가 줄고 고령화되면서 마당밟이는 중단되었다. 오래도록 중단되었던 민속이지만 이장을 맡고 있던 형선근 씨와 마을의 민속을 지키는데 늘 앞장서온 김성인 씨가 주민들의 뜻을 모아 마당밟이를 하기로 한 것이다.

오후 3시 정도에 도장 마을 회관 앞에서 형선근 씨, 김성인 씨, 김천호 씨 세 사람이 꽹과리를 치기 시작하였다. 약 15분이 지나도록 사람이 모이지 않자 과연 성사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걱정도 잠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마을 회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여 30여 분 후에는 20명 가까이 모였다. 도장 마을 회관에 모인 사람들은 간소한 흰색 한복을 입고 그 위에 녹색, 홍색, 황색의 삼색 띠를 두르고, 머리에는 고깔을 썼다.

[주인 주인, 문 여소 문 안 열면 갈라요]

보통 사람들보다 지능은 다소 떨어지지만 늘 마을 일에 함께 하는 젊은이가 농자천하지대본이 적힌 농기를 들고 앞장서자,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를 든 사람들이 뒤따랐다. 각시탈을 쓴 사람, 포수 복장을 한 사람, 조리중 역할을 맡은 사람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그 뒤를 따랐다. 불편한 다리를 절뚝이며 매구패의 맨 끝자락에 선 김양기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벙글벙글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매구패는 도장 마을 회관에 시작하여 마을 회관 옆 공터에서 한바탕 신나게 매구를 쳤다. 그런 후에 마을 위쪽으로 올라가며 주민들 중에서 마당밟이 해주기를 요청하는 집을 차례차례 들어갔다. 각 집에 이르면 상쇠가 “주인 주인, 문 열소! 마당볿이 들어가!”라고 소리를 치며 주인을 부른다. 주인이 나올 때까지 “주인 주인, 문 여소 문 안 열면 갈라요.”라고 하며 문굿을 친다. 주인이 나오면 마당으로 들어가서 한바탕 굿을 친 후 방으로 들어가 성주굿을 친다. 다음으로 우물이나 수돗가로 가서 샘굿을 친 후 부엌으로 들어가 정제굿[조왕굿]을 친다. 다음으로 장독대로 가서 장광굿[철륭굿]을 친후 다시 마당으로 나와 또 한 번 판굿을 친 다음 마무리를 했다.

대체로 집안에 우물이 없기 때문에 수돗가에 가서 샘굿을 쳤다. 옥상에 장독대가 있는 집은 옥상까지 올라가서 장광 굿을 치기도 했다. 농기계가 있는 집에서는 농기계 창고에 굿을 쳐주기도 했다. 매구를 요청한 집에서는 그릇에 쌀을 채우고 돈을 꽂아 두었고 과일이나 술, 명절 음식을 내놓고 대접하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운영하는 농산물가공공장에서도 한바탕 매구를 쳤다.

외지인으로서 마을 사람이 된 은우근 씨의 집에서도 마당밟이가 신나게 이루어졌다. 부부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와 마을 사람들을 맞이하는 부부의 모습에서 외지인으로서의 경계나 어색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민들의 호응은 높아졌고 마당밟이에 참여하는 사람이나 구경하는 사람이나 마당밟이를 요청하는 사람들 모두가 풍물굿 안에서 어우러지고 있었다.

[아들과 딸에게로 전승되는 도장 마을 마당밟이]

도장 마을 마당밟이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젊은 청년, 혹은 청소년들의 참여이다. 이날 마당밟이에는 당시 타지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형선근 씨의 아들과 김성인 씨의 딸이 함께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제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마당밟이를 하는 젊은 아버지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대학생 아들의 띠를 매어주는 형선근 씨의 모습과 아버지의 띠를 매어주는 아들의 모습이 따사롭고 훈훈했다. 고등학생 딸의 띠를 매어주는 김성인, 유정자 부부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올랐다.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서로 풍물 복색을 가다듬어 주고 함께 독려하며 풍물을 치는 모습에서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보제공]

  • •  김범순(남, 1938년생, 도장골 밭노래 한마당 축제 위원장)
  • •  김성인(남, 1958년생, 도암 역사 문화 연구회장, 도장 밭노래 마을 영농 조합 법인 총무)
  • •  형선근(남, 1945년생, 합동 위령제 추진 위원장)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