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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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愼義連孝子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노길 109[노촌리 67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호석 |
건립 시기/일시 | 1801년 - 신의련 효자각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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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신의련 효자각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노길 109[노촌리 671] |
성격 | 효자각 |
양식 | 겹처마 팔작지붕 |
재질 | 목재 |
크기(높이,너비,두께) | 205㎝[높이]|217㎝[너비]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신의련의 효자각.
[개설]
임진왜란 때 병든 아버지를 왜적의 손에서 지켜낸 신의련(愼義連)[1546~1606]의 효행을 포창하여 선조 때 수의 부위(修義副尉)를 증직하고 정려를 내렸다. 당시에 세워진 정려비는 현존하지는 않는다. 현재의 효자각은 1801년(순조 1)에 세워진 것이지만 중수의 내력은 전하지 않고 있다.
[건립 경위]
신의련은 임진왜란 때 자신의 집에까지 쳐들어 온 왜적들의 손에서 병든 아버지를 지켜냈다. 그의 효성에 감동한 일본 왜장이 “이곳은 효자가 사는 곳이다[孝子所居之地]”라는 방을 동구 밖에 써붙이고 부하들에게 절대 침범하지 말라고 명하고는 물러갔다. 이후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1만여 명이 무사히 피난을 하였다고 하여 그 후부터 이 골짜기를 만인동(萬人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왜적이 이 마을에 침범하지 않았는데 이 역시 신의련의 덕이라고 하였다. 당시 이곳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거의 5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여 그 동네 이름을 오만동(五萬洞)이라 하였고, 그 들을 면화평(免禍坪)이라 하였으며, 동네 앞에 높이 솟아 있는 산을 덕태산(德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의련의 효성이 알려지자 조정은 신의련에게 효자각을 세우게 하였다. 신의련은 1856년(철종 7) 백운동 충효사(忠孝祠)에 배향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는 신씨의 후손들이 노촌리의 효자각 밑에 영모정(永慕亭)을 건립하였다.
[위치]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앞 평창 초등학교에서 위쪽 도로로 5m쯤 가다 보면 우측 계곡의 바위 위에 세워진 영모정이 나오고, 길 건너편에 신의련 효자각이 있다. 효자각 바로 옆에는 유적비, 즉 미계 신선생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형태]
효자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주위에는 담장을 둘러 보호하고 있다. 효자각 안에 비석은 없으며 현판이 걸려 있다. 효자각의 사면에는 홍살을 둘러 놓았다.
[금석문]
효자각 내 현판의 상단에는 ‘증수의부위 효자 신의련지려(贈修義副尉 孝子愼義連之閭)’라고 쓴 다음에 아래에 신의련의 사적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1801년 4월 당시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글을 지었으며, 전 사헌부 지평 황기천(黃基天)이 글을 썼다.
[현황]
신의련 효자각은 거창 신씨 동족 부락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관리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특히 바로 옆에 세워진 신의련의 유적비, 건너편에 세워진 영모정과 함께 그 일대가 신의련의 유적지를 형성하고 있다. 다만 효자각을 둘러싼 담장의 일부가 2013년 8월 현재 훼손되어 보수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특히 순조 대 이후 급격하게 증대되고 있는 효자와 열녀에 대한 정려는 당시 유교적 가치가 사회 저변에 얼마나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순조 초에 건립된 신의련 효자각 또한 당시 유교적 가치를 존숭하였던 진안 지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진안 지역의 거창 신씨 동족 부락의 실태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