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8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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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羅州林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노석 |
입향지 | 나주 임씨 임도 입향지 - 전라북도 진안군 정천면 농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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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세장지 | 임도 묘소 - 전라북도 진안군 정천면 갈용리 |
성씨 시조 | 임비(林庇) |
입향 시조 | 임타(林㙐) |
[정의]
임비(林庇)를 시조로 하고, 임타(林㙐)를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진안군 일대에 살고 있는 세거 성씨.
[연원]
나주 임씨의 시조는 고려 시대 대장군 임비(林庇)이다. 임비는 1281년(충렬왕 7) 왕과 함께 원나라에 다녀온 공으로 시종 보좌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대장군, 충청도 도지휘사 판재사사에 이르렀다.
임비의 9세손 임탁(林卓)이 해남 감무를 지내다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회진으로 돌아가 살면서 본관을 회진으로 하였으나, 회진현이 나주에 속하게 됨에 따라 본관을 나주로 바꾸었다.
임탁의 8세손에서 갈라져 장수공파·정자공파·절도공파·첨지공파·도정공파 등의 파조가 생겼다.
[입향 경위]
진안에는 이조 임비의 16세손 절도공 임진의 아들인 백호 임제의 후손들과 16세손 정자공 임복의 손자 몽촌 임타(林㙐)의 후손들이 집성을 이루고 있다. 또한 임제의 현손 첨중추부사 임도(林燾)는 현종 대인 1835년에 나주에서 진안군 정천면 농산리로 이주하였다.
임타의 후손 중에 진안으로 이거한 사람은 임타의 아들인데, 4남 임중유(林重儒)[1642~1687], 5남 임달유(林達儒)[1645~1685], 6남 임홍유(林弘儒)[1648~1707], 7남 임만유(林晩儒)[1650~1711]이다.
이 외에도 나주 임씨로 타지에서 진안에 들어온 사람으로는 나주 절도사 진(晋)의 후손인 임면상(林冕相)이 고종 대에 남원에서 진안군 성수면 염북리로, 찬성 임붕(林鵬)의 후손인 임용수(林龍洙)가 1922년에 임실에서 진안군 진안읍 반월리로,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낸 임희진(林喜鎭)이 상전면 언건리로 이주하였다.
[현황]
진안군 상전면 언건리, 성수면 염북리, 정천면 농산리, 진안읍 반월리 등지에서 세거하고 있다. 나주 임씨는 2000년 기준으로 전국 7만 3556호에 23만 6877명, 전라북도에 4,537호에 1만 4070명, 진안에는 118호에 313명이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진안군 정천면 갈용리에 나주 임씨 정자공파 상주공계 용담 문중 세천비가 있고, 재실인 영모각이 있다. 또한 봉학리에도 조림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