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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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 弟子- 時代- 佔畢齋 |
영어공식명칭 | Jeompiljae, the Teacher of the Era Held in the Hearts of Young Student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상남면 마산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석태 |
[정의]
조선 전기에 활동한 밀양 출신 학자이자 문장가인 김종직의 이야기.
[밀양 산천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다]
김종직(金宗直)은 1431년(세종 13) 6월 8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온(季溫), 호는 점필재(佔畢齋),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아버지는 김숙자(金叔滋),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 박홍신(朴弘信)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8월 19일 고향 밀양의 집에서 세상을 떴다. 처음에는 지금의 밀양시 상남면 마산리 무량원에 묻혔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화를 입은 뒤 한골마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하였다. 1462년(세조 8)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로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를 겸하였고, 이듬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일시 파직되었다가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 이조좌랑(吏曹佐郎), 함양군수(咸陽郡守)를 거쳐 1476년(성종 7) 선산부사(善山府使)가 되었다. 1483년(성종 14)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오르고 뒤이어 좌부승지(左副承旨), 도승지 겸 예문관제학(都承旨兼藝文館提學), 이조참판(吏曹參判),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전라감사 겸 전주부윤(全羅監司兼全州府尹), 병조참판(兵曹參判), 한성좌윤(漢城左尹),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김숙자에게 배워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김숙자로 내려오는 조선 도학의 맥을 계승하였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유호인(俞好仁), 남효온(南孝溫), 조위(曺偉), 권오복(權五福), 이맹전(李孟專), 이종준(李宗準), 이주(李胄)와 같은 제자를 길러 내어 조선 사림의 영수이자 조선 유학의 태두로 일컬어진다. 저서로는 『점필재집(佔畢齋集)』, 『회당고(悔堂稿)』, 『청구풍아(靑丘風雅)』, 『동문수(東文粹)』, 『이존록(彛尊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이 있다.
사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과 구미 금오서원(金烏書院) 등에 모셔졌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문충’은 “도덕을 갖추고 학문을 널리 닦았다[道德博文]”라는 의미의 ‘문(文)’과 “청렴하고 공정하였다[廉方公正]”라는 의미의 ‘충(忠)’을 합한 글자이다. 학덕을 갖춘 도학자이자 정치가였던 김종직의 일생을 기린 것이다. 호 ‘점필(佔畢)’은 글의 깊은 뜻은 알지 못한 채 글자만 보고 읽는다는 말이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서 취한 것인데, 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의 삶을 겸사한 것이다.
[학자로서 조선 도학의 역사를 열어 내다]
김종직은 우리나라 한시(漢詩) 작품 수준을 중국 한시 작품 수준까지 높인 조선 제일의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당시 한시는 중국과의 외교문제를 처리하는 역량을 판별하는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문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한문을 사용하는 당시 정부에서 국가행정사무 처리 능력을 판별하는 척도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에서 한시 창작을 주요 과목으로 채택하였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과거 시험에 급제한 신진 관료들에게 특별 휴가를 주어 자신이 지은 한시 작품을 매달 초하루 예문관(藝文館)이나 홍문관(弘文館)에 제출하여 평가받게 하였다. 중국과의 외교문제나 국가행정사무의 원활한 처리를 위하여는 관료들의 한시 창작 능력을 향상시킬 필요가 절실하였던 것이다.
김종직은 뛰어난 한시 창작 능력을 바탕으로 관료로서 빠르고 순탄한 출세가도를 달려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다. 김종직은 한걸음 더 나아가 한시 창작을 위주로 한 글공부를 통하여 도학 공부의 길을 찾아내었다. 이황(李滉)의 말을 빌자면, 글공부를 통하여 도학 공부의 길을 찾아내고, 또 이를 통하여 훌륭한 제자를 많이 길러 내어 백세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김종직에 대한 이황의 말은 다음과 같다. “점필재의 사문이 백세에 이름나니[佔畢師門百世名]/ 문[글]을 통하여 도를 찾아 큰 선비 길러 냈네[沿文泝道得鴻生]/ 공을 반도 못 이룬 채 난리를 당하였나니[成功未半嗟蒙難]/ 혼미한 자 잠을 미처 깨우지 못하였네[喚起群昏尙未醒].”
이 중에서 ‘글을 통하여 도를 찾았다[연문소도(沿文泝道)]’고 한 말은 후일 이이(李珥)가 이황을 두고 인문입도(因文入道)하였다고 한 말과 동일한 뜻이다. 이이는 이황이 성현의 서책을 읽는 글공부를 통하여 도학의 세계로 들어가서 대성한 학자임을 높이 기려 인문입도하였다고 한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이황은 김종직이 성현의 서책을 읽는 글공부를 통하여 도학의 세계를 열어 낸 학자임을 높이 기려 연문소도하였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김종직은 조선 도학의 역사를 열어 낸 학자·교육자로서 연구와 교육에 힘을 쏟았을 뿐만 아니라, 정치가·예학가(禮學家)로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 조선이 사회와 문화 등 전 분야에서 전대와는 다른 새로운 문명을 열어 가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예학가로서 유교 제례의 근본을 바로 세우다]
우리나라 성균관(成均館)과 향교(鄕校)의 사당 대성전(大成殿)에는 처음에 고려시대에 공자(孔子)를 비롯한 역대 성현의 화상(畫像)을 모셨다가, 1320년 원나라 국자감(國子監)의 제도를 본받아 그것을 소상(塑像)으로 바꾸어 봉안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 성균관 대성전에는 위패(位牌)를 봉안하였지만, 향교 대성전에는 고려의 옛 제도가 그대로 남아 여전히 소상을 봉안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김종직이 1455년 성주향교(星州鄕校) 대성전에 배알하고 「알부자묘부(謁夫子廟賦)」를 지어 밤나무 신주로 바꾸어 봉안할 것을 권하여 전국 향교 대성전에 소상 대신에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김종직의 문집 속 연보(年譜)에서 “조정에서 이 소식을 듣고 임금께 아뢰어 위패로 바꾸어 봉안하게 되었다.”라고 한 것을 통하여, 이때 성주향교 대성전에 봉안하던 소상을 위패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모든 향교 대성전에 봉안하던 소상이 성주향교와 같은 때 한꺼번에 모두 위패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성종실록(成宗實錄)』 1480년 8월 29일 자 기사에는 성종(成宗)이 성균관 대성전에 봉안한 공자 이하 역대 성현의 위패를 소상으로 바꾸는 것에 대하여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들의 의견을 묻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때 승지들은 소상이 불상과 다를 바 없는 데다가 원나라의 그릇된 습속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건국 초기 위패로 바꾸어 봉안한 것이라고 반대하였지만, 성종은 “명나라 국자감과 우리나라 평양·개성의 향교 대성전에도 소상을 봉안하고 있고, 또 소상이 위패보다 바라볼 때 더욱 존엄함을 우러르게 된다.”라는 이유를 들어 성균관 대성전에 봉안한 공자 이하 역대 성현의 위패를 소상으로 바꾸고 싶다는 내용의 전교(傳敎)를 내렸다. 그러나 성종의 이러한 뜻은 관철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성종이 이때 대성전에 소상을 봉안하고 있는 예로 평양향교와 개성향교 정도를 들고 있는 것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1455년(세조 1) 김종직의 권유로 성주향교에서 대성전에 봉안한 소상을 위패로 바꾼 이후 다른 향교에서도 대성전에 봉안한 소상 대신에 위패를 봉안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종 대를 거쳐 명종 대 이후로는 전국 향교 대성전과 사대부 사당에 봉안하던 소상이 위패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창건이 추진되던 서원의 사당에도 자연스럽게 위패를 봉안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의 정황은 이황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재직하던 제자 황준량(黃俊良)에게 보낸 1560년 9월 6일 자 서찰에서 “점필재는 비록 성주 출신은 아니지만, 성주향교에서 부친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고, 또 「알부자묘부」를 지어 그곳 대성전의 소상을 위패로 바꾼 일이 있으므로, 그곳 영봉서원(迎鳳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에 제향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한 말을 통하여 대략 짐작하여 볼 수 있다. 당시 영봉서원에서 제향 인물 선정을 둘러싸고 창건을 주도한 지역 사림이 서로 대립하고 있을 때, 스승 김종직을 주향으로 하고 제자 김굉필을 배향하는 것이 한 가지 대안임을 밝히면서 한 말이다. 김종직은 김굉필에게 『소학(小學)』에 대한 가르침을 내려 조선 도학이 새롭게 발전하는 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알부자묘부」를 지어 성주향교 대성전에 봉안한 소상을 위패로 바꾼 것이 조선 사회가 새롭게 변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황은 같은 문제로 제자 황준량에게 답한 1560년 9월 29일 자 서찰에서 “점필재는 우리 조선에서 태산북두와 같은 명망이 있는데도 자꾸 헐뜯으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김종직이 「알부자묘부」를 지어 성주향교 대성전에 봉안한 소상을 위패로 바꾼 것이 성주향교 한 곳만으로 그친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고 그 명망이 태산북두와 같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김종직에 의하여 성주향교 대성전에 봉안한 소상이 위패로 바뀐 이후 그 영향으로 전국 향교 대성전과 사대부 사당에 봉안한 소상이 위패로 바뀌고, 나아가 당시 한창 창건이 추진되던 서원의 사당에도 자연스럽게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음을 염두에 두고 김종직의 명망이 태산북두와 같다고 한 것이다. 김종직에 의하여 전래 민간신앙과 불교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 있던 유교 제례가 근본부터 바로잡힌 것이다. 나아가 김종직에 의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적극적으로 실천되면서 도래할 주자학 시대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사관으로서 공론 정치의 시대를 준비하다]
김종직은 중국과 우리나라 역사를 제재로 한 작품을 여러 편 지었다. 그중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세조의 왕위 찬탈 및 단종 시해와 관련한 전대의 불의를 중국 역사에 빗대어 직필한, 그리하여 시대의 불의에 항거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서 “세조의 왕위 찬탈과 단종 시해에 대한 충분(忠憤)을 붙였다.”라는 사평(史評)을 달아 사초(史草)에 실음으로써 후일 사화(史禍)로 일컬어지는 무오사화를 촉발시킨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 때문에 김종직은 부관참시의 화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조의제문」 등에서 스스로 불의한 임금으로 지목한 세조 때 도리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였다는 이유로 출처(出處)의 도리조차 모른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은 건국 이후 태종 때에 이르러 왕조가 안정되면서 사관이 임금의 언행을 포함한 조정 중대사를 직필로써 기록하는 것이 널리 권장되었다. 사관은 자신이 기록하고 사평을 달은 사초를 개인적으로 보관하다가, 해당 임금 사후 실록청(實錄廳)이 열렸을 때 사초를 제출하여 실록 편찬의 기초 자료로 삼게 하였고, 실록 편찬 뒤에는 사초를 없애 훗날 구설의 거리를 원천적으로 제거하였다. 사초 기록과 보관에서부터 실록 편찬까지의 과정 일체에 사관의 직필이 왜곡되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제도적으로 보장하였다. 이를 통하여 조선은 사림의 공론이 형성되면서 임금이나 몇몇 훈구대신(勳舊大臣)이 권력을 전횡하여 나라를 그르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시대 사림들은 젊은 시절 대부분 사관의 직책을 거치기 때문에 왕조의 안정과 함께 시대와 역사에 대한 투철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또 이들 중에는 당대 사림의 공론을 사초로 직필하거나 개인의 저술로 직필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처럼 스승 김종직이 당대 사람의 공론을 개인의 저술로 직필하였던 것을 제자 김일손이 “세조의 왕위 찬탈과 단종 시해에 대한 충분을 붙였다.”라는 사평을 달아 사초에 직필하면서 개인의 저술이 실록에 실릴 국가의 역사로 바뀌게 된 것이다.
김일손의 사초가 일부 훈구대신들이 정적을 제거하려고 일으킨 무오사화의 결정적인 빌미가 되고, 그 과정에 사관과 실록에 대한 조선의 완비된 제도가 잠시 붕괴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후일 4대 사화를 겪은 뒤 마침내 사림의 세상이 되자, 이제는 중앙 조정에만 사림의 공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 고을에도 고을 내 사림의 공론이 존재하게 되었다. 사림의 공론, 사림의 여론이 중앙 조정의 정치만이 아니라 지방 고을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공론 정치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공론 정치의 시대를 활짝 열어 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조의제문」과 관련하여 출처의 도리조차 모른다고 비판하는 것은 지엽적인 문제를 지적한 것일 수밖에 없다. 산림처사 조식(曺植)의 제자로서 평생 출처대절(出處大節)[자신의 뜻을 펼 수 있는 상황이면 현실에 적극 참여하고,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물러나 자기 수양에 힘쓰는 절도(節道)를 말함]을 숭상하던 스승의 가르침에 충실하였던 성여신(成汝信)이 「동방제현찬(東方諸賢贊)」에서 김종직에 대하여 우리나라 도학과 문장의 연원이라고 극찬한 다음, 이어서 김일손에 대하여 “요순시대를 꿈꾸며 세도를 만회하려다가 사화에 희생되었지만 만고의 공론을 부지하였다.”라고 극찬한 것은 「조의제문」과 관련한 김종직과 김일손에 대한 일부 비판을 적절하게 해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자로서 도학 심법의 요체를 전수하다]
김종직은 1482년(성종 13) 밀양향교 여러 학생에게 보낸 「여밀양향교제자서(與密陽鄕校諸子書)」에서 “재(齋)라고 하는 것은 심신을 검속한다는 것이고, 명륜(明倫)이라고 하는 것은 인륜을 밝힌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향교 동재·서재의 집 재(齋) 자를 재숙(齋宿)한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강당 명륜당의 명륜을 인륜을 밝힌다는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풀이하여 유생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학문의 목표를 간명하고 절실하게 제시하였다. 유생들은 동재와 서재에 기숙하면서 재계하는 마음으로 공경히 사당에 모신 공자 이하 역대 성현들을 본받아서 자신의 덕성을 닦고, 명륜당에 올라 인륜을 밝혀 세상에 교화를 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후일 도학 시대의 심학(心學) 또는 심법(心法)의 요체가 된 지경공부(持敬工夫)의 중요 내용을 거의 온전하게 담아낸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 다른 주장을 내며 다투는 언어의 과잉으로 본뜻가 흐려진 후일, 도학 시대 심학 또는 심법에 대한 여러 발언보다 훨씬 간명하고 절실하게 심법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밀양향교 유생들은 김종직의 「여밀양향교제자서」를 자신들에게 전수하여 준 심학 또는 심법의 지침으로 잘 간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종직의 지우이자 당대 최고의 문인 학자 강희맹(姜希孟)이 「여밀양향교제자서」를 친필로 써서 보관하였던 유묵(遺墨)이 현재 전하고 있는 것과 김종직 생가인 추원재(追遠齋) 대청에 ‘전심당(傳心堂)’이라는 현판이 걸린 것이 방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소학』의 가르침을 토대로 한 김종직의 이 말은 김굉필과 정여창, 조광조(趙光祖)와 이언적(李彦迪) 등을 거쳐 이황과 신계성(申季誠), 조식에게 이르러 도학 시대에 걸맞은 심학 또는 심법으로 체계화되었다. 이황에 의하여 ‘주정(主靜)의 지경공부’로 확립되었고, 신계성과 조식에 의하여 김종직이 사관으로서 시대의 불의에 항거하였던 정신까지 함께 계승되어 의리 실천을 특히 중시하는 ‘경의(敬義)의 철학’으로 확립되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김종직이 「여밀양향교제자서」를 통하여 제시한 심학 또는 심법의 요체는 이황, 신계성, 조식에 의하여 체계화된 나중의 도학 시대 심학 또는 심법의 선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원에 모셔져 후인들의 숭앙을 받다]
김종직은 생전에 덕행, 정사, 문장에서 당대 제일의 학자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게다가 김종직의 문하에는 늘 배움을 청하는 젊은 선비들이 가득하였다. 학자로서 글공부를 통하여 도학의 세계를 열어 내면서 시대의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 선비들이 그 문하로 쏠리게 된 것이다. 그중에는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만이 아니라 지방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는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김종직은 관학(官學)인 집현전이 폐지된 이후 한 개인의 몸으로 관학 집현전의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와 같은 젊은 선비들의 쏠림 현상을 이황은 “점필재의 문장은 쇠퇴한 시대를 일으켜서, 도를 찾는 선비들이 그 문하에 가득하였네[佔畢文起衰 求道盈其庭].”라고 노래하였다. 후일 예림서원 강당 이름을 구영당(求盈堂)이라고 한 것은 여기서 취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젊은 선비들의 쏠림 현상은 김종직 생전에 이미 문제가 되고 있었다. 당시 훈구대신들은 김종직과 젊은 제자들을 두고 경상선배당(慶尙先輩黨) 또는 소학당(小學黨)이라는 질시 어린 비난을 하였거니와, 그러한 질시가 더 발전하여 나가 뒷날 무오사화를 촉발하게 된 것이다.
사화에 희생당한 대부분은 김종직의 제자이거나 제자의 제자들이었다. 김종직의 제자는 대략 60명 정도이다. 그중에서 문과급제자가 42명, 장원급제자가 13명, 문과 장원 외에 소과 장원과 대과·소과에 상위권 성적으로 급제 또는 합격한 사람이 상당수에 이른다. 출신 지역은 서울이 28명, 영남이 28명, 나머지 지역이 4명이고, 출신 가문은 선대에 문과에 급제하거나 출사한 적이 있는 가문 출신이 44명, 공신을 배출한 가문 출신이 19명, 종실과 인척 관계에 있는 가문 출신이 8명이다.
이와 함께 김종직은 사후에도 길이 남을 모범으로 후세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비록 중간에 약간의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지만, 조정에서는 학덕을 갖춘 도학자이자 정치가였던 김종직의 업적에 합당한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이황의 조언으로 1567년 고향 밀양에 후일 예림서원으로 바뀐 점필서원(佔畢書院)[덕성서원(德城書院)]이 창건된 것으로 시작하여 사림들은 고향 밀양을 포함한 여러 고을에 김종직을 기리는 서원을 세워 두고 계속 제를 지면서 숭앙하였다. 이황이 점필서원 상향(常享) 축문(祝文)에서 “당시의 영수이고 후세의 태산북두였다.”라고 한 것처럼, 글공부를 통하여 도학 공부의 길을 찾아내고, 또 그 길을 통하여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 내어 훗날 도학의 시대를 크게 열어 놓은 공적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종직에 대한 앞으로의 연구와 이해의 방향]
김종직은 조선 사림의 영수이자 조선 유학의 태두로서 업적에 합당한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김종직이 죽은 후 생전에 아끼던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서 스승을 지극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어 시대의 불의를 직필한 것 때문에 사화의 과정에 부관참시의 화를 입었다. 그리고 생전에 아끼던 또 다른 제자 남효온(南孝溫)이 “천 년에 오직 한 분은 점필재 김 선생이네[千載一人金佔畢].”라고 극도로 칭송한 끝에 다시 사관의 입장에서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다 스승 김종직과 제자 김굉필이 서로 길을 달리하였다는 ‘상이(相貳)’의 문제를 직필하면서 조선 도학의 역사를 열어 낸 학자에서 일개 문인으로 격하되는 비극을 겪었다. 그 이후 중앙 정국의 변동으로 밀양을 포함한 경상남도 지역 사림이 정치권에서 거의 소외되면서 조선시대 내내 업적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말았다. 게다가 일개 문인으로 지목한 그 말은 조선시대를 지나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유효한 지침으로서 김종직에 대한 연구와 이해의 방향을 지배하고 있다.
『점필재집』을 위시한 김종직의 여러 저작은 사화에 훼손됨이 없이 대부분 온전하게 남아 있다. 도리어 사화로 제자들 대부분이 희생되면서 글을 거의 다듬지 않은 초고 상태로 서둘러 간행되는 바람에 후일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글들이 적지 않게 실려 있다. 사화로 대부분의 글이 유실된 것은 김종직이 아니라 젊은 나이에 희생된 제자들이다. 제자들의 글은 현재 제대로 전하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를 위시한 여러 기관에서 김종직의 학문과 사상 등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거의 매해 개최하면서도 눈에 띄는 성과를 쉽게 얻지 못하는 주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도학자 김종직의 학문적 실체를 밝히기가 몹시 어렵다. 이와 같은 자료의 한계를 극복하고 연구의 새로운 길을 열어 가는 것이 현재 연구자들의 앞에 놓인 과제인 셈이다. 앞으로 더욱 발전된 연구 성과가 나오고, 그것을 기반으로 좋은 강의 및 홍보의 자리가 많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