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613 |
---|---|
한자 | 三一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하지영 |
[정의]
1919년 3월 13일부터 4월 초까지 밀양 일대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개설]
1919년 3월 1일 경성 파고다공원에서 울려 퍼진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밀양에서의 독립 만세 운동]
밀양 지역 첫 시위는 3월 13일 밀양시장에서 일어났다. 경성의 만세 시위에 참가하고 돌아온 윤세주(尹世胄)[1900~1942], 윤치형(尹致衡)[1893~1970] 등이 밀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 밀양교회 기독교인과 함께 장날을 기하여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오후 1시경 윤세주 등이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시작하자 시장에 모여 있던 1,000여 명의 군중들도 이에 호응하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밀양면의 헌병과 경찰뿐만 아니라 부산에서 급파된 헌병, 수비대까지 합세하여 시위대를 무력으로 탄압하였고, 시위대는 결국 해산하였다. 밀양시장에서는 이튿날인 14일을 비롯하여 15일, 20일, 4월 2일까지 시위가 이어졌다.
4월에는 밀양 읍내뿐만 아니라 외곽의 다른 면에서도 시위가 전개되었다. 4일 단장면(丹場面)의 태룡리(台龍里) 시장에서, 6일 부북면(府北面) 춘화리(春化里)에서, 10일 청도면(淸道面) 인산리(仁山里)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단장면 태룡리 시장 시위는 일대에서 가장 큰 시위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상자를 낸 시위였다. 시위는 표충사(表忠寺) 승려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정오 무렵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선두에 선 표충사 승려들이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자 5,000여 명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일제히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군중들은 단장면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헌병 등을 공격하였고, 밀양군 읍내에 있던 밀양헌병분견대에서 헌병들이 급파되었다.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는 등 무력을 행사하자 군중들은 오후 1시 30분경 해산하였다.
[의의와 평가]
밀양의 3·1운동은 3월 초부터 4월 초까지 한 달 이상 지속되었는데, 지역적으로는 3월에는 중심지인 밀양면에서, 그리고 4월에는 밀양면 인근 지역에서 일어났다. 지역의 경우 중앙과의 연결고리가 약하였던 탓에 지도 세력 없이 시위가 고립·분산적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으나, 밀양에서는 학연, 지연, 혈연, 비밀결사, 종교, 마을 공동체 등을 매개로 조직화된 운동이 전개된 특징을 보였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유교와 기독교, 불교 등 지역 내 종교 조직들도 총동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