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7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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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正進學校 - |
영어공식명칭 | Site of JungJin School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퇴로로 227[퇴로리 280-5]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정원 |
건립 시기/일시 | 1907년 - 화산의숙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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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921년 - 정진의숙 설립 |
건립 시기/일시 | 1922년 - 정진의숙에서 정진학교로 개명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10년 - 화산의숙 폐지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39년 4월 - 정진학교 폐교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5년 - 정진학교 터 정진의숙 창학 기념비 건립 |
소재지 | 정진학교 터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퇴로로 227[퇴로리 280-5] |
성격 | 교육기관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에 있는 사립학교 터.
[변천]
정진학교는 항재 이익구(李翊九)가 1907년에 설립하였던 화산의숙(華山義塾)을 계승한 학교이다.
밀양 지역은 경상남도의 내륙 지역에 위치하여, 보수적인 유교 문화의 전통이 강한 지역으로서 유림들의 중심지였다. 15세기 후반 경상남도 밀양에 입향한 여주이씨(驪州李氏) 가문은 우리 민족의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적인 유학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학문을 수용하는 ‘신구병진’(新舊竝進)의 학풍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여주이씨 자유헌공파 이만백의 7대손인 항재 이익구 일문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주력하였던 것은 신교육이었다. 이에 1907년 화산의숙을 설립하고 일본인 교사 2명을 초빙하여 자손들에게 신학문과 측량 기술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1910년 8월 조선이 일제에 강점당하게 되면서 화산의숙은 폐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학으로 화산의숙의 명맥이 유지되어 1919년 3·1운동 이후 수학, 물리학 등 신지식을 가르치는 학교로 변모하였다. 학교 건립 장소와 재원 확보를 위하여 인근 유지들과 협의하였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고 이병규(李炳圭)·이병곤(李炳鯤)·이병원(李炳瑗) 등 이씨 일문에서 재원을 염출하여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앞에 부지를 마련하고 학교 건물을 지었다.
이후 1921년 3월 25일 다시 이씨 형제들은 사립 보통학교인 정진의숙(正進義塾)을 설립하여 문중의 자제들과 인근 지역의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창학 강령은 화산의숙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여 명륜정덕(明倫正德)·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 하였고, 교육의 중점은 국민 윤리와 애국 정신 및 신지식의 함양에 두었다. 이에 따라 한글,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애국가창, 배일 교육 등을 통해 애국 애족 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산수·이과·교련 등을 가르쳤다. 1922년 2월 정진의숙에서 정진학교로 개칭하였다. 1932년 8월에는 정진학교 졸업생들이 자발적으로 동창회를 조직하고 동창회보 발행을 준비하였다. 민족 교육 및 회보 발행 등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인해 정진학교는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그 결과 1939년 4월 강제로 폐교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복교(復校)되어 공립 화양국민학교로 운영되었고, 1960년 4월 다시 정진국민학교로 개명하였다. 1975년에는 동문회에서 뜻을 모아, 교정에 ‘정진의숙 창학 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학생 수 급감으로 1996년부터는 부북초등학교 정진분교로 운영되었다가 1998년 9월 1일 부북초등학교로 통폐합되었다.
[위치]
정진학교 터는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에 있다.
[의의와 평가]
정진학교는 19세기 후반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전통적인 유학의 가치를 고수하면서도 실학적인 기반 위에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할 신학문을 수용하여 경상남도 밀양 지역의 자제들을 교육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하여 경상남도 밀양 지역에서는 항일 정신의 뿌리인 민족 교육의 힘을 양성할 수 있었고 동시에 항일 투쟁의 필요성과 민족의 독립을 도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