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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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世桓 |
이칭/별칭 | 공서(公瑞),공간(恭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창래 |
출생 시기/일시 | 1470년 - 한세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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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92년 - 사마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95년 - 별시문과 병과 급제, 승문원 권지정자, 정언 |
활동 시기/일시 | 1499년 - 춘추관 기사관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501년 -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옴 |
활동 시기/일시 | 1502년 - 사헌부 지평 |
활동 시기/일시 | 1503년 - 홍문관 부응교 |
활동 시기/일시 | 1507년 - 돈녕부 정, 사간원 대사간 |
활동 시기/일시 | 1508년 - 우승지 |
활동 시기/일시 | 1509년 - 이조 참의 |
활동 시기/일시 | 1513년 - 함경도 관찰사 |
활동 시기/일시 | 1516년 - 한성부 우윤, 이조 참판 |
활동 시기/일시 | 1517년 - 한성부 판윤, 이조 판서 겸 도총관, 지돈녕부사 |
활동 시기/일시 | 1518년 - 경상도 관찰사 |
활동 시기/일시 | 1519년 - 한성부 판윤, 좌참찬 겸지춘추관사 |
활동 시기/일시 | 1520년 - 의정부 우참찬, 호조 판서, 지중추부사 |
몰년 시기/일시 | 1522년 - 한세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22년 - 시호를 받음 |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운동로 61번길 21[방서동] |
묘소|단소 | 한세환 묘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유원지로 406-31[삼상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청주 |
대표 관직 | 호조 판서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 자는 공서(公瑞). 증조할아버지는 한(韓䂠)이고 할아버지는 군자감 정 한치원(韓致元)이며, 아버지는 첨정 한운(韓運)이다. 어머니는 예안 이씨로 전풍군(全豊君) 이신(李愼)의 딸이다. 부인은 전직 이영령(李永齡)의 딸로 경주 이씨다.
[활동 사항]
한세환(韓世桓)[1470~1522]은 1492년(성종 23) 사마시에 급제하고,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병과 2위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 정언이 되었다. 그 뒤 예조 좌랑·병조 좌랑, 지평, 병조 정랑, 승문원 부응교, 의정부 검상, 사인을 거쳤다. 1499년(연산군 5) 선무랑 행예문관봉교(宣務郞行藝文館奉敎)로서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1년(연산군 7)에는 질정관(質正官)으로 천추사(千秋使)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2년(연산군 8) 사헌부 지평, 이듬해 홍문관 부응교가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이 심해지자 자주 직언을 올려 임금의 미움을 샀다. 이 때문에 승진을 못하다가 1506년 중종반정 후에 등용되었다. 1507년(중종 2) 돈녕부 정(敦寧府正),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고, 1508(중종 3) 우승지, 1509년(중종 4) 이조 참의가 되었다. 1513년(중종 8)에는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 굶주리는 백성을 거두었다.
1516년(중종 11) 한성부 우윤, 이조 참판을 거쳐 1517년(중종 12) 한성부 판윤, 이조판서 겸 도총관, 지돈녕부사가 되었다. 1518년(중종 13) 경상도 관찰사, 1519년(중종 14) 한성부 판윤, 좌참찬 겸 지춘추관사, 1520년(중종 15) 의정부 우참찬을 거쳐 호조 판서,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522년(중종 17)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중 과로로 세상을 떴다.
한세환은 성품이 부드럽고 겸손하였으며, 효심이 깊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문안을 여쭈었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여막(廬幕)[무덤 근처에 지은 오두막]에 머물면서 묘를 정성스럽게 살폈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에 무덤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공간(恭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