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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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致亨 |
이칭/별칭 | 통지(通之),질경(質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창래 |
출생 시기/일시 | 1434년 - 한치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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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51년 - 호위청 기사 |
활동 시기/일시 | 1453년 - 사온서 직장, 감찰 |
활동 시기/일시 | 1463년 - 사헌부 장령 |
활동 시기/일시 | 1467년 - 장례원 판결사,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
활동 시기/일시 | 1468년 - 함길도 관찰사 |
활동 시기/일시 | 1469년 - 호조 참판, 동지중추부사, 산릉도감 제조 |
활동 시기/일시 | 1470년 - 사헌부 대사헌 |
활동 시기/일시 | 1471년 - 좌리공신 3등 책록 |
활동 시기/일시 | 1473년 - 개성부 유수 |
활동 시기/일시 | 1475년 - 청성군 겸 경기도 관찰사 |
활동 시기/일시 | 1479년 - 한성부 판윤 |
활동 시기/일시 | 1480년 - 공조 판서, 지중추부사,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옴 |
활동 시기/일시 | 1481년 - 호조 판서, 좌참찬,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옴 |
활동 시기/일시 | 1485년 - 경상도 진휼사,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옴 |
활동 시기/일시 | 1486년 - 한성부 판윤, 형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487년 - 경상도 관찰사 |
활동 시기/일시 | 1489년 - 유도대장 |
활동 시기/일시 | 1491년 - 병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492년 - 선공감 제조 |
활동 시기/일시 | 1493년 - 의정부 좌찬성 |
활동 시기/일시 | 1494년 - 종묘 행향사 |
활동 시기/일시 | 1495년 - 대사헌, 판의금부사 |
활동 시기/일시 | 1496년 - 우의정 |
활동 시기/일시 | 1498년 - 좌의정 |
활동 시기/일시 | 1500년 - 영의정 |
몰년 시기/일시 | 1502년 - 한치형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02년 - 시호를 받음 |
추모 시기/일시 | 1506년 - 신원 |
출생지 | 서울특별시 |
묘소|단소 | 한치형 묘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유원지로 산60-1[삼상리] |
신도비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유원지로 산60-1[삼상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청주 |
대표 관직 | 영의정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한치형(韓致亨)[1434~1502]은 외척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네 임금을 모시고 최고 벼슬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큰 공적은 없지만 또한 드러난 과실도 없었다. 마음가짐이 조용하고 엄격하였으며 공무는 엄정하게 처리하였다. 조정에서 외손자에게 벼슬을 주려고 하자 “이 늙은 것 때문에 어리석은 아이에게 벼슬을 줄 수는 없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연산군(燕山君)이 정치를 어지럽힐 때 누차 검소와 절용할 것을 간언하다가 미움을 샀고 그 화가 죽은 뒤에까지 미쳤다.
[가계]
본관은 청주. 자는 통지(通之). 할아버지는 신창 군수 한영정(韓永矴)이고, 아버지는 정랑 한절(韓石+失)이다. 어머니는 한양 조씨로 중군 총제 조서(趙敍)의 딸이다. 첫째 부인은 전주 이씨로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단양 우씨로 안변 도호부사 우연지(禹延之)의 딸이다. 성종의 어머니이자 세조의 맏며느리였던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한치형의 큰아버지인 한확(韓確)의 딸이므로, 소혜왕후는 사촌 누이가 된다.
[활동 사항]
한치형은 1451년(문종 1) 18세에 음직(蔭職)으로 호위청 기사 벼슬을 받은 뒤 1453년(단종 1)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 감찰, 1463년(세조 9) 사헌부 장령, 1467년(세조 13) 장례원 판결사가 되었다. 그해 5월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를 거쳐, 12월 이조 참판·호조 참판으로 승진하였다. 1468년 예종 즉위 직후 함길도 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호조 참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같은 해 성종 즉위 후 산릉도감 제조, 가선대부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
1470년(성종 1) 사헌부 대사헌, 다음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록되고, 가정대부에 이어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473년(성종 4) 개성부 유수, 1475년(성종 6) 청성군 겸 경기 관찰사, 호조 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79년(성종 10) 한성부 판윤, 이듬해 공조 판서,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1년(성종 13) 호조 판서, 의정부 좌참찬을 지냈고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3년 후 또 다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고모가 명나라 성조의 비였기 때문에 한치형은 황제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1485년(성종 16) 경상도 진휼사로 나가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였다. 1486년(성종 17)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 1487년(성종 18) 경상도 관찰사, 1489년(성종 19) 유도대장, 1491년(성종 21) 병조판서가 되었다. 1492년(성종 22) 선공감 제조를 겸하고, 1493년(성종 23) 의정부 좌찬성, 1494년(성종 24) 종묘 행향사를 겸하였다. 연산군이 즉위한 1494년 대사헌, 판의금부사를 겸하였고, 이듬해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1498년(연산군 4) 좌의정일 때 유자광(柳子光), 노사신(盧思愼) 등과 무오사화를 지휘하여 김일손(金馹孫)을 비롯한 신진 사림파 관료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1500년(연산군 6) 영의정으로 승진 후 국경 수비를 위해 북쪽에 장성(長城) 건립을 추진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이를 말리는 상소를 올려 임금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1502년(연산군 8) 세자사를 겸하였고 같은 해 세상을 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임금의 생모인 윤비(尹妃)의 폐출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윤필상(尹弼商), 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부관참시(剖棺斬屍)[죽은 사람에게 형벌을 내림] 당하고 가족들도 죽임을 당하였다. 1606년 중종반정 직후에 신원되었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 청주 한씨 묘역 중앙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묘는 단분 합장으로 북서쪽을 향하고 있다.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문인석, 장명등 등 옛 석물과 새 비석이 있다. 묘표는 이수형 2면 비다. 이수의 크기는 너비 83㎝, 높이 48㎝, 두께 28㎝이고, 비신는 너비 68㎝, 높이 91㎝, 두께 24㎝이다. 복두공복(僕頭公服) 차림의 문인석은 높이 180㎝, 장명등은 140㎝이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질경(質景)이다.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간사함이 없어서[忠正無邪] 질(質)이라 하였고, 의리에 의해 성사하여[由義而濟] 경(景)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