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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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百濟時代 |
영어공식명칭 | Baekje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고대/삼국시대/백제 |
집필자 | 임재수 |
[정의]
B.C. 18년부터 660년까지 삼국시대 백제와 관련된 충청남도 예산 지역의 역사.
[개설]
백제는 B.C. 18년에 한강 유역에서 건국하였다. 근초고왕 때인 4세기에는 마한 54국을 병합하여 고대국가를 완성하였다. 고대국가가 완성된 후에는 고구려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도 한성을 잃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웅진 천도 후 혼란이 계속되다가 무령왕 때에 이르러 혼란을 극복하고 중흥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성왕 때에는 다시 한번 웅비하기 위해 사비로 천도하였다. 사비 천도 후에 백제는 지방통치를 강화하고, 일본에 불교를 전해 주는 등 동아시아 문물 교류를 주도하였지만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의자왕이 항복하고 말았다.
의자왕의 항복 후에는 예산 임존성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이 전개되었지만 663년에 임존성이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됨으로써 백제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웅진, 사비기의 예산]
예산 지역에서는 이미 동서리의 청동 유물에서 알 수 있듯이 초기철기시대가 되면 화려한 청동기 문화가 꽃피었다. 이러한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목지국, 혹은 마한 54국의 하나가 예산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예산에 있었을 가능성이 큰 마한의 소국은 결국 백제로 편입되었을 것이지만 그 구체적인 시기를 알기는 어렵다. 다만 근초고왕 때에는 마한 전체가 백제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는 만큼 예산 지역도 4세기경에는 백제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예산 지역이 4세기경에 백제로 편입되었다 하더라도 백제에서 예산 지역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웅진 천도 이후로 보인다.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보물 제794호]이나 수덕사와 같은 불교 문화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은 웅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사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대체로 웅진 말 사비 초 예산 지역은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이 조성될 정도로 백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549년 무렵에는 중국에서 유학하던 발정 승려가 백제로 귀국하여 수덕사에서 활약하였다. 이로써 볼 때 이때 이미 수덕사가 창건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백제부흥운동과 예산]
사비기에 백제는 전국을 5방(方), 37군(郡), 200현(縣)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그때 예산 지역에는 임존성, 마시산군(馬尸山郡), 금물현(今勿縣), 오산현(烏山縣)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임존성은 백제부흥운동이 가장 먼저 시작되고, 또 백제부흥운동 기간 내내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된 것으로 보아 5방성의 하나인 서방성(西方城)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임존성은 통일신라 때에는 임성군(任城郡)이 된다. 임성군의 영현(領縣)이 고량부리현과 오산현이다. 고량부리현은 지금의 청양이고, 오산현은 지금의 예산읍내 일대이다.
예산 관내에는 마시산군도 설치되어 있었는데, 현재의 덕산 일대에 해당된다. 영현은 금물현과 우견현(牛見縣)이었다. 금물현은 현재의 예산군 고덕면 일대이고, 우견현은 홍성의 갈산면 일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