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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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집필자 | 윤용혁 |
[정의]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충청남도 예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예산은 내포의 중심 도시이다. 고대 이래의 역사적 전통이 예산의 중심성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백제부흥운동의 거점, 뛰어난 불교문화 유산, 고려 통일 전쟁기 예산의 역할, 초기 천주교 전파의 못자리, 걸출한 독립운동가의 배출, 근대 상업과 농업의 발전 등은 예산 역사의 중심 개념이다.
[예산군의 역사와 문화]
1978년 대흥면 동서리에서 출토한 다량의 청동 유물은 초기 국가 형성기 예산 지역의 비중을 단적으로 입증한 것이었다. 동서리에서 출토한 청동 유물은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경으로 추정되었다. 하나의 무덤에서 출토된 화려한 유물의 존재는 국가 형성 시기 예산의 대흥 지역에 정치적으로 유력한 수장(首長)이 등장하였던 사실을 반영한다.
예산은 660년 부여 함락 이후 663년까지 4년에 걸친 백제 부흥전쟁의 첫 시발지이자 최후까지의 거점이었다. 흑치상지 장군이 임존성[대흥면]에서 부흥군을 일으키자 10일 만에 무려 3만 명이 이에 호응하였다고 한다. 임존성은 주류성이 함락당한 이후에도 663년 11월까지 부흥군의 거점을 유지하였다. 백제시대 예산 대흥 지역[임존성]은 백제의 동서남북중, 5방의 하나인 ‘서방성(西方城)’이 설치된 곳이었고 이것이 부흥운동의 거점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백제부흥운동에서 보여준 충절정신은 이후에도 계승되어 예산 지역에서는 순교자와 의사, 지사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백제시대 예산의 불교 문화유산은 당시 예산 지역이 갖는 문화적 비중을 말해 준다. 봉산면 화전리의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보물 제794호], 대흥 출토의 금동불, 수덕사의 건립 등이 그것이다. 1308년(충렬왕 34)에 건립된 수덕사 대웅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목조 건축의 하나이다. 대웅전은 규모는 크기 않으나 아름답고 간결한 건축미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측면 가구(架構)의 아름다움으로 정평이 있다. 이러한 예산 지역의 예술성은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로 이어졌다. 예산 출신의 추사 김정희는 한국의 최고의 서예가이며 고증학자이다. 신암면에는 김정희가 거처하던 고택, 묘소, 그리고 근년에 건축한 기념관이 있다. 예산 출신 자암 김구(金絿)[1488~1534]도 글씨와 학문으로서는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김구 이후 김정희로 이어진 예술성은 근대에 이르러 고암 이응로로 이어졌다.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고려 태조 왕건은 즉위 이듬해인 919년 ‘예산’이라는 이름으로 지명을 개명하였다. 왕건의 예산에 대한 관심은 삼한 통일 직전인 934년 왕이 신하와 군사를 이끌고 직접 예산에 내려왔던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각료들을 대동한 왕건은 예산에 직접 행차하여 내포 지역민들을 겨냥한 교서를 발표하였다. 자신이 '아들같이 사랑하는' 백성들로부터, 관리들이 과중한 세금을 함부로 걷지 말라는 것이 교서의 핵심 내용이었다. 이듬해 신라가 왕건에게 자진 복속하고, 다시 936년, 왕건은 견훤을 앞세워 신검군을 공격함으로써 후삼국 통일의 대장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로부터 200여 년 뒤인 1176년(명종 6) 예산에서는 손청(孫淸)이라는 인물이 민란을 주동하였다. 손청은 세력을 규합하여 예산을 장악하였으며 자칭 ‘병마사’를 칭하였다. 손청의 세력은 인근의 대흥, 덕산 등지로 확대되었으며 아울러 가야산에 지휘부를 두고 정부군에 대항하였으나 1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조선 후기 예산은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의 학문을 계승 발전한 거점이 되었다. 그 계기는 이익의 숙부 이명진이 혼인으로 덕산에 거주하게 된 것으로부터 이다. 이들의 활동은 내포 천주교의 전파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었다. 내포 지방은 지방민의 자진구도(自進求道)에 의하여,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방이다. 그 중심은 여사울[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마을] 사람 이존창(李存昌)이 1784년 조직한 여사울 신앙공동체였다. 여사울 신앙공동체에 의해 내포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급속히 전파되었다. ‘내포의 사도’로 불리우는 이존창은 1801년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하였다.
1894년 전봉준에 의해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내포 지역도 이에 호응하였다. 내포 지역 봉기는 10월 1일 서산, 태안에서부터 시작되어 덕산 관아를 파괴하고 10월 하순에는 신례원과 예산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갑작스러운 동학군의 기습에 예산산성에 매복해 있던 관군은 대포도 제대로 쏘아보지 못한 채 지휘관이 전사하였다.
동학과 의병운동의 구국정신은 국권이 상실된 이후로는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덕산 출신의 윤봉길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청년 시절 윤봉길은 월진회(月進會)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덕산에서 농촌진흥운동에 헌신하던 중,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중국 상하이로 갔다. 상해임시정부의 김구(金九) 휘하에 들어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벌어진 일본 천황 생일 기념 행사장에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조선 청년의 기개를 전세계에 알렸다. 독립운동가로서 이남규(李南珪)[1855~1907]와 김한종(金漢鍾)[1883~1921] 의사가 예산 출신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19년 3.1운동의 봉기에도 예산은 적극적이었다. 내포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3월 3일 예산읍내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고, 이후 신간회운동의 지부가 예산에 설치되기도 하였다. 나라가 위기에 부닥쳤을 때 보여 준 충의정신은 7세기 후반 백제부흥운동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예산은 삽교천 유역 넓은 평야의 농업생산을 바탕으로 하여 상업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 상업의 주요 네트워크였던 보부상단이 예산에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라는 조직을 운영한 것도 그러하고, “예산에 가서는 옷 잘 입은 체하지 말라.”라는 이야기는 근대 예산 상업 발달의 한 상징이기도 하다. 1913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은행이며 대표적인 민족은행인 호서은행이 예산에 설립된 것은 근대 예산이 갖는 상업에서의 중심성을 입증한다. 전문 경영인에 의해 운영된 호서은행은 한때 광천, 천안, 안성 등지에 지점을 개설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1936년 충남제사공장의 설립도 이러한 배경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었다. 충남제사공장은 해방 이후 충남의 대표적 직조회사인 충남방적으로 이어졌다.
예산은 충청남도 농업 생산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예산농업학교[현재 공주대학교 산업과학대학]를 비롯하여 예당저수지, 사과, 농업기술원 등은 예산농업의 대표 상징이다. 예산은 농업 거점도시로서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전통 있는 덕산온천과 가야산 등의 자원을 배경으로 관광산업의 진흥에 진력하였다. 덕산온천은 1981년 온천지구로 지정되어 중부 지역의 대표적 휴양시설로 꼽히게 되었다. 2005년부터 10년 동안에 걸쳐 추진된 내포문화권 개발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역사 관광 거점으로서의 예산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2년에 부설된 철도 교통 이외에 2009년 당진영덕고속도로가 예산을 경유하게 되고, 천안, 당진, 서산, 공주, 홍성 등 주변 도시와 연결되는 국도가 확장, 정비되면서 예산의 도로 교통은 크게 개선되었다. 한편 계획 중에 있는 제2서해안고속도로가 완공되고, 신창역까지 이어진 수도권 전철이 예산역으로 연결되면 예산의 발전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것이다.
예산군은 1914년 행정구역 조정에 의하여 예산, 대흥, 덕산을 통합하여 예산군으로 재출발하였다. 3개 군현 중 덕산은 조선 초까지는 덕풍(德豊)과 이산(伊山)의 2개 군현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예산의 전통적 행정상 골격은 예산, 대흥, 이산, 덕풍의 4개 군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을 근대에 이르러 합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산군의 현재와 미래]
2006년 2월, 충청남도청 이전 예정지가 예산·홍성 지역으로 확정되고 이후 신청사가 완공되어 2013년부터 내포 도청 시대가 개시되었다. 도청 이전과 함께 교육청, 경찰청, 충청남도공사, 도서관 등 다양한 기관이 내포 신도시로 이전하거나 신설되었다. 이와 맞물려 예산군의 홍성군과의 통합 논의도 현안으로 떠올랐지만, 아직은 예산 나름의 발전 노력이 더욱 요구되는 시점이다.
2018년 4월에는 예산군 신청사의 개청식을 가졌다. 2019년은 ‘예산’의 이름이 시작된 지 1,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착안하여 예산군에서는 ‘예산 1100년’을 기회로 삼아 예산의 역사 관광자원을 적극 개발하고 활용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교통 체계의 개선을 토대로 한 산업단지의 조성, 풍부한 역사문화 자원을 활용한 관광산업의 활성화는 향후 예산의 새로운 발전을 견인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