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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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 고려 후기 |
집필자 | 문경호 |
[정의]
918년 고려 개국 때부터 1392년 멸망 때까지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918년 고려 개국 이후 예산군 지역은 고려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후삼국 통일부터 무신 집권기, 몽고 침입기,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 고려시대 예산군의 역사를 살펴보며 고려시대 행정구역 개편과 문화유산에 대해 알아본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예산]
후삼국 시기 예산 지역은 후백제의 웅주(熊州)[공주] 관할에 있었다. 그 후 면천 출신의 박술희와 당진 출신의 복지겸이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후고구려의 영역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궁예는 웅주까지 진출하였으나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자 당시 웅주를 수비하고 있었던 이흔암(伊昕巖)이 고려의 수도인 철원으로 올라가면서 웅주는 다시 후백제의 영역이 되었다. 이때 운주[홍성]와 임성군[현재의 예산 대흥면 지역]도 후백제에 귀부했으나 현재의 예산읍 일대인 고산현(孤山縣))은 고려에 남았다. 이에 919년 태조는 유일하게 충청도에서 고려에 귀부한 고산현을 예산현(禮山縣)이라고 개칭하였으며, 마군장군(馬軍將軍) 홍유와 대상(大相) 애선(哀宣)을 보내 유민(流民) 500여 호를 옮겨 안착시키고 후백제 공격의 발판으로 삼았다.
925년에는 왕건의 휘하에 있었던 유금필이 임성군을 쳐서 후백제 장수 형적 등을 죽이고 성을 빼앗고 임성군을 대흥군(大興郡)으로 개명하였다. 임존성 백성들을 위로하고 달램으로써 예산현과 함께 후백제 공격의 전진기지로 삼고자 하는 조치였다. 이 시기의 예산이 예산진(禮山鎭)으로 불린 것도 이러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934년 왕건은 예산진에 행차하여 민심을 위로하는 조서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후삼국의 분열과 패권 쟁탈 과정에서 많은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니 공경장상으로 나라의 녹봉을 먹는 관리들은 자신이 백성을 자식처럼 여기는 것처럼 녹읍으로 받은 고을의 백성들을 사랑하라.”라는 것이었다. 예산진 조서 발표 이후 왕건을 지지하는 세력은 더욱 늘어났다. 그러한 배경에 힘입어 934년 9월에는 후백제에게 빼앗겼던 운주성을 다시 되찾았다. 그 해에 고려군이 후백제군과 싸워 크게 승리하자, 웅진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귀부하였다. 935년에는 견훤과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고려군이 후백제의 신검 군을 크게 격파하고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시대 예산의 행정구역 개편]
고려시대 태조~성종 대의 예산은 운주(運州)[홍주]와 천안부(天安府)의 영역에 속해 있었으며, 크게 이산현, 대흥군, 덕풍현, 예산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예산현은 1018년(현종 9)에 천안부의 속현이 되었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현재의 대흥면 일대인 임성군은 940년 대흥군(大興郡)으로 개칭되었다가 1018년 홍주(洪州)에 속하였고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었다. 본래 이산군이었던 예산군의 서부 지역은 이산현으로 강등되어 운주의 속현이 되었으며, 그 영현(領縣)이었던 금무현은 덕풍현(德風縣)으로 개명되어 운주의 속현이 되었다. 청무현은 청양현(靑陽縣)으로 개칭되어 천안부의 속현이 되었다.
이러한 행정구역의 재편은 예산 지역을 운주와 천안부에 소속시킴으로써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후백제에 협조한 것에 대해 불이익을 주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신 집권기의 예산]
1170년 무신들이 문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농민들을 수탈하자 그동안 억눌려 있던 농민과 천민들이 신분 해방을 외치며 봉기하였다. 그중 예산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건이 1176년 정중부 집권 시기에 일어난 망이와 망소이의 난이다. 공주 명학소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망이와 망소이의 난은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를 휩쓸었다. 망이와 망소이는 스스로를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고 칭하며, 토지를 잃고 떠도는 농민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웠다. 망이와 망소이는 유성과 공주를 점령하고, 관군 3000여 명과 싸워 승리하였다. 난은 점차 확대되었으나 당시 무신정권은 당시 평양에서 일어난 조위총의 난에 대항하느라 남적(南賊)이라 불린 망이와 망소이 세력을 진압하지 못하였다. 이에 정면 돌파가 어렵다고 판단한 무신정권은 명학소의 주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소를 대신하여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키고, 농민들을 위로하여 본래의 근거지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곧 조정에서 난의 주동자들을 잡아 가두려 하고, 과도한 세금을 거둬들이려 하자 1180년 2월 10일에 재봉기하였다. 당시 왕실 및 귀족의 후원을 받았던 직산의 홍경원을 불태우고 홍경원 주지를 협박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담은 글을 가지고 개경으로 올라가게 하였으며, 가야산을 근거지로 일어난 손청(孫淸)과 연계하여 예산현을 점령하고 감무를 살해하였다. 또한, 충청도의 청주목 치소를 제외한 나머지 군현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전면적인 토벌작전을 벌이자 망이, 망소이 등이 붙잡힘으로써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손청을 우두머리로 했던 예산 지역의 농민봉기군은 명학소의 주민들과 같이 수공업품 생산에 동원되어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로 추정된다. 응봉면 건지화리에는 아직까지도 쇠농과 야철지 유적이 남아 있다.
[몽고 침입기의 예산]
1231년(고종 18)부터 1259년(고종 46)까지 6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 몽고군이 예산 일대에 나타난 것은 1235년부터 있었던 3차 침입 시기였다. 1235년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들어온 당올태(唐兀台)는 온수(溫水)[온양], 죽주(竹州)[죽산], 대흥(大興)[예산] 등지를 침입하였다.
먼저 1236년 9월 정사에 몽고군이 온수군을 포위하니 군리(郡吏) 현려(玄呂) 등이 문을 열고 나가 싸워 이를 크게 물리쳤다. 소식을 전해들은 왕은 온수군의 성황신(城隍神)이 몰래 도와준 공이 있다 하여 신호(神號)를 더 봉해 주고 현려를 군의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1236년 12월 계묘일에는 대흥의 성에서 몽고군을 크게 무찔렀다는 승전보가 전해졌다. 1236년 12월 몽고군이 대흥의 성을 오랫동안 공격하자 고려의 정병들이 문을 열고 나가 크게 패퇴시킨 후 병장기를 노획하였다. 이때 대흥의 성은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었던 임존성으로 추정된다.
[고려 말 왜구 침입기의 예산]
고려 말 예산 인근에 왜구가 침입했다는 기사는 그리 많지 않다. 고려군은 일본군 갑사들을 살해하고, 왜구의 피해를 극심하게 당하면서도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관군과 합세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의 포는 단순히 배가 드나드는 곳이 아니라 일종의 말단 행정구역이자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공민왕 때 최영의 건의로 이산현에 도절제사를 설치하고, 왜구의 침입을 피해 인근 성으로 피신한 것도 고려시대 왜구 침입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내린 조치였다.
[문화유산]
고려시대 예산 지역에서 제작된 가장 주목되는 문화유산은 목조건축, 분묘, 주거 유적 등 이다. 먼저 목조건축물로는 예산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을 꼽을 수 있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1308년(충렬왕 34)에 지은 건물로,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수덕사에는 예산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381호], 수덕사 삼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 등의 유물이 있다. 삽교읍 신리에 있는 예산 삽교읍 석조보살입상[보물 제508호]도 고려시대 충청 지역의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석불이다.
예산읍 삼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5호]이나 대술면의 장복리 삼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6호]도 고려시대 제작된 석탑으로 비교적 우수한 것이다. 분묘와 주거유적으로는 예산읍 예산리, 관작리, 수철리, 발연지 등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건축 기반 시설과 기와 파편 등이 상당수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