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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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庾黔弼-任存城 陷落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문경호 |
발생|시작 시기/일시 | 925년 - 유금필의 임존성 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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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임존성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
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유금필 |
[정의]
925년(태조 8) 고려 장수 유금필이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 지역의 임존성을 함락한 사건.
[개설]
고려와 후백제가 세력을 다투던 시기 충청남도 지역의 상당 부분이 후백제의 영역으로 넘어가자 고려 장군 유금필은 925년(태조 8) 임성군(任城郡)을 공격하여 후백제 장수 형적 등 3,000여 명을 죽이고 임존성(任存城)[지금의 예산군 광시면 마사리와 상중리 일대]을 차지하였다. 이어서 임성군을 대흥군(大興郡)으로 고치고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역사적 배경]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925년(태조 8) 동 10월에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유금필을 파견하여 장군 길환을 살해하였다. 또한 임존군을 쳐서 3,000여 명을 살획하였다(遣征西大將軍庾黔弼攻百濟燕山鎭 殺將軍吉奐又攻任存郡殺獲三千餘人).”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임존성에서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경과]
고려가 백제와 각축을 벌이던 시기 예산의 임존성은 후백제의 북부 경계 지역이었다. 925년 태조는 유금필을 정서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전에 잃은 후백제의 북쪽 경계[충청남도 북부 지역]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유금필은 태조 즉위 직후 후백제로 귀부한 연산진[지금의 세종시 일대]을 공격하여 함락한 후 웅주[공주], 운주[홍성]과 함께 고려를 배반한 임존성을 쳤다. 임존성의 군사가 끝까지 저항하므로 쳐들어가 살해하였다.
927년(태조 10) 겨울 견훤과 왕건은 오월의 조서에 따라 편지를 교환하고 화의를 맺었다. 이때 견훤은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 경주로 진격한 왕건을 빗대어 “메추리가 새매의 날개를 치려는 것과 같았다.”라는 내용의 모욕적인 편지를 보내왔다. 그러자 왕건은 신라를 공격하여 왕을 살해한 견훤을 비난하는 한편, “수전으로 공격할 때는 호룡처럼 박등하였고, 출장하면 전투에 승리하였으니 길환을 참한 것이 그 예이며, 임존성을 빼앗던 날에는 나적(那積) 등 수백인이 죽음을 당하였다.”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이를 통해 볼 때 임존성이 당시 고려의 영역에 있었으며, 당시 임존성을 지키고 있던 백제의 장군이 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과]
고려의 임존성 함락에 대한 반격으로 견훤은 조물성[지금의 경상북도 의성]을 쳤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려와 후백제는 상호 인질을 교환하고, 화의를 맺었다. 그러나 후백제의 인질로 고려에 온 견훤의 조카 진호가 1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화의가 결렬되었다. 견훤은 진호의 죽음이 고의적인 것이라고 의심하고 웅진으로 진격하였다. 왕건은 견훤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다음해인 926년에는 운주를 공격하여 성주 긍준(競俊)의 군대를 굴복시켰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웅주를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유금필의 임존성 함락으로 인해 예산현과 임존성 일대는 고려 건국의 발판이 되었다. 특히, 태조는 천안에 전초기지로 천안부(天安府)를 설치하고, 운주와 탕정군(湯井郡)[지금의 온양]에 성을 쌓고, 예산현에 군대를 주둔시켜 충청남도 지역에서의 우위를 다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