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94
한자 六二五戰爭
이칭/별칭 한국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문경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7월 20일 - 6.25전쟁 북한군에 밀려 예산 경찰 철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9월 28일 - 6.25전쟁 예산 주둔 북한군과 부역 혐의자들이 예산에서 철수

[정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불법남침함으로써 충청남도 예산군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전개된 전쟁.

[개설]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북한군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낙동강 이북까지 남하했다. 이에 맞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당시 북한 점령 지역에서는 반공 결사 단체와 인민군의 대립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예산 지역 역시 ‘삼학사’를 비롯한 ‘DX단’으로 대표되는 반공 단체의 활동이 전개되면서 좌우익이 서로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을 기점으로 북한군이 패주하면서 남한 지역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에 따라 예산 지역에서도 많은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역사적 배경]

미국과 소련은 1945년 9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였다.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이 이른바 ‘애치슨라인’을 설정하여 한반도를 극동 방위 구역에서 제외시키자,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동의 아래 남침을 단행하였다.

[경과]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6월 30일부터 한강을 건너기 시작하여 7월 8일 경에는 천안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각 지역에서는 주요 인사를 피난시킴과 함께 정부의 지시에 따라 예비 검속을 시행하여 보도연맹원들을 경찰서 유치장에 잡아 가두었다. 예산 지역의 보도연맹원 학살은 7월 10일부터 11일 사이에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광시면의 경우에는 지서의 유치장에서 학살이 집행되었고, 응봉면의 경우는 체포하여 이송하는 도중에 학살하였다.

1950년 7월 20일 새벽에 북한군에 밀려 예산 경찰이 철수하자 북한군은 14일 오후 무렵 예산 읍내의 군청과 경찰서 등 주요기관을 접수하였다. 처음에는 약 50명 정도가 주둔하였으나 곧 철수하고 몇 명만 남아서 군청과 경찰서를 지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익 청년들은 은둔과 도피를 반복하며 다양한 형태의 방해 공작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지방 좌익 인사들은 우익 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폭력적으로 핍박하였다.

북한군이 예산 지역을 장악하자 지방의 좌익 인사들은 북한군의 힘에 기대어 지방 통치기구를 장악하고, 경찰이나 관료, 혹은 우익 청년단의 간부들을 색출하여 인민재판을 시행하였다. 마을 단위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치안대, 여성동맹, 민주청년동맹과 함께 지역을 통치하였다. 예산군의 공산당 위원장은 광시면 장전리 출신의 차진석이 맡았다. 차진석은 6.25전쟁 이전에 미군정과 대한민국 경찰의 집요한 탄압을 피해 남로당 지하조직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인민위원회는 궐기대회[인민재판]의 형식으로 우익 인사들을 학살하였다. 궐기대회는 대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렸으며, 이로 인해 20여 명의 우익 인사들이 처형되었다. 우익 인사들에 대한 학살은 오히려 북한군 퇴각 시기에 대대적으로 단행되었다. 이들은 반공 인사들과 지식인들을 우물에 빠뜨려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예산 주둔 북한군과 공산군 부역 혐의자들이 예산에서 철수한 것은 1950년 9월 28일 경이었다. 북한에서 내려온 공작원들의 지시에 따라 월북할 사람들과 남을 사람들을 구분한 뒤, 월북할 사람들은 광덕산 방면으로 갔다. 잔류를 결정한 사람들은 대둔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퇴로가 막히자 가야산으로 들어가 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좌익 세력들이 철수를 서두르자 숨어 있던 우익 인사들은 인천상륙작전 소식을 듣고 국군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익 인사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오가면 지역의 ‘삼학사사건’이나 대술면 장복리의 ‘태극동맹사건’이 발생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예산이 수복되자 피난했던 우익인사들과 경찰이 복귀하여 좌익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을 벌였다. 우익 인사들은 청년방위대나 대한청년단을 중심으로 태극연맹이나 치안대를 조직한 뒤 부역 혐의자들을 집단으로 색출, 처단하였다. 잔류를 선택한 좌익 인사들은 산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경찰과 복흥대 또는 우익 청년단에 의해 여러 곳에서 처형되었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예산 지역 민간인 피해 학살 조사에 따르면 당시 학살이 자행된 곳은 예산읍내 향천리 여우골 공동묘지, 관작리 득지기 공동묘지, 역내다리 하천변, 광시천변 구티 학살터 등 33군데였다고 한다.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다시 서울이 재점령되자 많은 피난민들이 남으로 내려왔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예산의 우익 인사들은 보복을 피해 피난하거나 국민방위군 등에 가입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곧 유엔군의 반격을 받고 후퇴하자 사태는 진정되었다. 이 당시 예산에서는 중공군의 남진 소식을 들은 잔여 좌익 세력이 중공군 환영대회를 준비하다가 대한청년단원들에게 체포되어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전쟁이 휴전에 들어간 후에도 예산 지역 곳곳에서 좌우익 간의 보복이 반복되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결과]

6.25전쟁은 한국인 모두에게 큰 피해와 상처를 남겼다. 예산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좌우익 세력들의 진영이 상대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예산 군민 전체가 공포와 두려움에 떨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유린되는 상황을 목격해야 하였다. 살아 남은 피해자나 가해자의 가족과 친지들은 서로를 원수로 여기며 살았다. 이 과정에서 극단적인 반공 이념이 강요되면서 처벌받지 않은 친일파 세력이 재집권하였으며, 많은 인재들이 양 진영의 대립 속에서 목숨을 잃게 되면서 일본 제국주의 또는 독재 권력에 부합했던 이들이 재산과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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