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653
한자 禮山鄕校所藏記錄物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교길 31[향천리 132-1]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현대/현대
집필자 류용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예산향교 -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예산향교 충청남도 기념물 제138호로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86년 -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재회운영 절목』 작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87년 -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흥학절목』작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88년 -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교중주방폐단 절목』작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90년 -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청금록』작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99년 -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향교서재금록』완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85년 -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대성전 중수기 작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12년 -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향교 중수기 작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57년 -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문묘 중수기 작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88년 -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향교 중수기 작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88년 -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흥학서 작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75년 -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을묘중수시 헌성유생명단 작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5년 -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향교 중수기 작성
현 소장처 예산향교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교길 31[향천리 132-1]지도보기
원소재지 예산향교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교길 31[향천리 132-1]
성격 문서류
재질 종이|나무
소유자 예산향교
관리자 예산향교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정의]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에 있는 예산향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각종 자료.

[개설]

향교 운영의 구체적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 교생(校生)[조선시대에 향교에 다니던 생도] 및 유생[재임] 명단인 『청금록(靑衿錄),』과 운영 방식과 체제에 관련된 절목, 향교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알려주는 「전답안」,「노비안」이 그 자료들이다. 예산향교에는 이 가운데 『청금록』과 서재교생안, 각종 절목과 현판 등이 전하고 있다. 다만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들 대부분이 1886년 이후 것이어서 조선 시기의 본 모습을 추적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형태]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가운데 문서류는 유안(儒案)[조선 시대에, 성균관·향교·서원 따위에 있던 유생(儒生)의 명부], 교생안(校生案)으로서 『청금록』, 『경학원선생안(經學院先生案)』, 『향교서재금록(鄕校西齋襟錄)』이 남아 있다.

『청금록』[가로 29㎝, 세로 39㎝]은 청금록이라 표제가 적혀 있으며 묵선으로 7행을 구획한 뒤 성명을 기록하고 있다. 1890년(고종 27)에 작성된 것인데, 이교식(李敎稙)부터 총 51명이 기록되어 있으며 성씨는 비교적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청금록에 기록된 인명은 전반부의 기록은 청금유안이지만, 후반부는 향교 재임 명단이다. 수록 인물을 성씨별로 보면 전주이씨 6명, 영산신씨 5명, 한산이씨 5명 순이다.

『경학원선생안』은 일제강점기의 자료로 조성하(趙成夏)[풍양인]부터 한인호(韓麟鎬)[청주인]까지 총 336명이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예산 지역의 유림안이다. 성씨별로 보면 전주이씨 30명, 여흥민씨 26명, 안동김씨 26명, 풍양조씨 20명, 광산김씨 19명, 은진송씨 8명의 순서이다. 아마도 이 순서가 예산향교운영에 영향력을 가진 성씨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향교서재금록』[가로 12.8㎝, 세로 32.5㎝]은 묵선으로 10행을 구획하여 작성하였는 데, 김제은(金濟殷)에서 시작하여 방재근(方在根)까지 총 92명의 서재 유생의 성명이 적혀 있다[이 중 2명은 후대의 추가 기록이다]. 예산향교의 경우 서재유생은 원납교생으로서 그들로부터 수렴한 재정으로 향교 운영 경비를 충당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는 절목 모음이 첨부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서재교생 수가 90명으로 정해진 과정을 잘 알 수가 있다. 작성 연대는 표지에 기해년으로 기록되어 최종적으로 완성된 1899년에 마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명단에는 도할(刀割)과 대자(代子) 등 변동사항도 첨기되어 있으며, 명단 뒤에는 절목류(節目類)가 첨부되어 있어 예산향교 재정 운영의 실상을 살필 수 있다.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가운데 절목류는 『재회운영절목(齋會運營節目)』, 『교중주방폐단절목(校中廚房弊端節目)』, 『흥학절목(興學節目)』이 남아 있다. 『재회운영절목』[가로 29.5㎝, 세로 32.5㎝]은 1886년(고종 23) 3월에 작성된 1책[13면]이다. 향교의 유생들의 집회인 춘추재회(春秋齋會)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절목으로, 모범적인 임원의 선정과 경비의 운영에 대하여 밝히고 있다. 재회의 비용은 감영에서 지급받은 500냥을 본전으로 하여 그 이식으로 강학의 경비를 마련하도록 정하고 있다. 500냥 중 엽전 40냥은 감영, 나머지 당오전 460냥은 본읍에서 특별히 획급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 이 절목은 3건이 작성되었는데 그중 1건은 감영에 비치하게 하고 나머지 2건은 예산현과 향교에 나누어 비치하여 영구히 바뀌지 않도록 하였다. 말미에 수령의 수결이 있다.

『교중주방폐단 절목』[가로 28.5㎝, 세로 33㎝]은 1888년(고종 2) 2월에 작성된 1책[5면]의 절목이다. 예산향교에서는 향교의 대제 시 제 비용을 염출하기 위하여 별도의 주방을 마련하여 소를 잡아 경비를 충당하여 왔다. 그러나 우유전국(牛油電局)에 납부할 소가죽[우피(牛皮)]은 일정량을 나누어 보내야 하는데 형세상 징납이 매우 어려웠으므로 감영과 의논하여 오원리면(五元里面) 신탄(新炭) 소재의 향교 주방에 관의 육직(肉直)[육고에 속하여 관아에 육류를 바치던 관노(官奴)]을 보내어 전담 관리하도록 한 후에 그곳에서 직접 납부하도록 하고, 세전 110냥도 나누어 비축했다가 봄가을로 나누어 각 50냥과 60냥씩 납부할 것을 정한 절목이다. 2건을 만들어 하나는 향교에 하나는 육직에 비치하여 이를 증거로 준행하기로 하였다.

『흥학절목』[가로 29.5㎝, 세로 36㎝]은 1887년(고종 24) 서울에 흥학원을 세우고 향교도 서울의 규례에 따르게 하였을때, 당시 예산현감 이시우가 마련한 1책 [12면]의 절목이다. 서문은 도유사 이교직이 지었고, 작성 시기는 1888년(고종 25)이다. 서문에 흥학의 중요성과 현감 이시우의 노력으로 향교 중수가 이루어진 사실이 기록되었고, 흥학을 위한 별도의 절목이 첨부되어 있다. 즉 향교의 제반 경비 마련을 위하여 본읍의 잡미 중 18석을 감영에 보고한 후 제급하여 사용하도록 하되, 이의 지출과 운영에 관한 6조의 절목을 열거하고 있다. 절목의 내용은 수입, 장훈[1인]과 학도[10인] 설치, 그들에 대한 예급 액수, 수복에 대한 경비 보조, 경비 지출의 계획성 등을 지목하고 있다.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가운데 기타 자료 『대제홀기(大祭笏記)』[22㎝×28㎝]가 남아 있다. 묵선에 7행으로 구획되어 있고 현재도 석전례에 사용하는데, 표지에는 기미년(己未年)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가운데 현판류는 8개가 남아 있다. 유생수규(儒生守規)는 심잠[송준길 서], 경재잠(敬齋箴), 사물잠(四勿箴), 백록동강규(白鹿洞講規), 숙흥야매잠[송준길 서], 사성재잠(思誠齋箴), 주일잠(主一箴), 애일재잠(愛日齋箴), 마빙수잠(磨凭堅箴) 등의 내용으로 연대는 미상이다. 대성전 중수기(大成殿重修記)[1785년]는 현감 권기헌이 기하였다. 향교 중수기(鄕校重修記)[1812년]는 현감 이순겸이 기하였다. 문묘 중수기(文廟重修記)[1857년]는 현감 조희갑이 식하였다. 향교 중수기(鄕校重修記)[1888년]는 현감 이시우가 기하였다. 흥학서(興學序)[1888년]는 도유사 이교직이 찬하였다. 을묘중수시 헌성유생명단(乙卯重修時獻誠儒生名單)[1975년]는 전교(典校) 이회봉이 찬한 현판으로 328명의 헌성 유생 명단, 중수 시 임원 명단을 기록하였다. 향교 중수기(鄕校重修記)[1995년]는 전교 유충렬이 찬하였다.

[특징]

예산향교 소장 기록물 중 『청금록』은 서재교생과 보생에 대한 기록이 매우 풍부한 것이 특징인데, 2책의 서재교생안 역시 1899년과 1900년의 자료라는 점에서 향교의 운영이 난맥상이 드러날 때의 자료인 것이 아쉽다. 자료 중에 노비안이나, 전답안, 그리고 교촌민의 실상에 대한 경제적인 자료는 보이지 않지만, 서재의 운영이나 경비 조달 방침들은 19세기 말 향교 운영 실태를 점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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