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6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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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州金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720년 - 김한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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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758년 - 김한신 사망 |
본관 | 경주 - 경상북도 경주시 |
입향지 | 경주김씨 예산 입향지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
묘소|세장지 | 김한신 묘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
성씨 시조 | 김알지(金閼智) |
입향 시조 | 김한신(金漢藎) |
[정의]
김알지를 시조로 하고 김한신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예산군의 이거 성씨.
[개설]
경주김씨(慶州金氏)의 기원은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에서 시작한다. 김알지는 서기 65년(탈해왕 9) 굴성 서편 계림에서 나무 끝에 걸려 있는 금궤에서 태어났다. 탈해왕은 기뻐하며 성을 김으로 하사하여 경주김씨가 시작되었다. 김알지가 신라 13대 왕에 즉위하면서부터 신라의 왕성이 되었다.
경주김씨 시조는 경순왕과 왕비 죽방부인 박씨 사이의 셋째 아들 김명종(金鳴鍾)[영분공파 추정]과 후비 낙랑공주 왕씨 소생의 1남 김은열(金殷說)[은열공파]을 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오는 계통이 대표적이다. 또한 경순왕의 후손으로 전하는 김장유(金將有)[판도판서공파], 김인관(金仁琯)[태사공파], 김순웅(金順雄)[장군공파]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는 계통 등 크게 5개 파로 갈라져 후대로 내려오면서 10여 개의 지파(支派)가 생겨났다.
경주김씨 문중에서는 김한신의 입향 후 판서 김노경(金魯敬), 참판 김노영(金魯永), 추사 김정희, 산천 김명희(金命喜) 등의 인물을 배출하였다.
애국지사 김상준(金商俊), 효자 김병제(金秉濟)·김상익(金商翊)·김의재(金義載), 상공부 이사관 김정길(金正吉), 이태화(李泰和)의 처 효부 김씨(金氏), 인창선(印昌善)의 처 효부 김씨(金氏), 표학상(表鶴相)의 처 열부 김씨(金氏)도 예산 경주김씨 문중 출신이다.
[연원]
예산에 입향한 경주김씨는 상촌공(桑村公) 김자수(金自粹)의 5대손인 김연(金堧)이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입향하여 터를 잡고 세거지를 삼은 데서 시작한다. 김연은 무과 출신으로 서흥부사가 되어 임꺽정의 난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우고 서산에 세거지를 정한 후, 충청도 서해안 일대의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번성하였다.
[입향 경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증조할아버지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1720~1758]은 영조(英祖)의 딸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해 임금의 사위가 되었다. 화순옹주는 사도세자의 동복누이로 영조가 각별히 사랑하던 딸이었다. 김한신은 왕실의 도움으로 동대문 밖에 학문을 갈고 닦을 수 있는 땅을 마련하였고, 예산 용산 오석산(烏石山) 일대를 친산으로 사들이기도 하였다. 용산은 삽교천 하류에 있어 내포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육해로의 교통 요지이며, 서울에서 서산선영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였다. 또한 김한신은 혼인에 따른 별사전으로 용궁리 일대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이때 충청도 53개 고을에서 한 칸씩 분담해 53칸에 이르는 대저택을 지었고, 그때 지은 김한신의 집이 현재의 추사 고택이다.
[현황]
2001년 발간된 『예산군지』에 따르면 예산군내에 경주김씨는 1,718세대가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읍면별 분포 상황은 예산읍 424세대, 삽교읍218세대, 대술면 70세대, 신양면12세대, 광시면 56세대, 대흥면 59세대, 응봉면 150세대, 덕산면 142세대, 봉산면 63세대, 고덕면 137세대, 신암면 188세대, 오가면 199세대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경주김씨는 2015년 현재 예산군에 4,329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관련 유적]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는 경주김씨와 관련된 유적들이 다수 남아 있다.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묘와 추사 영당(秋史影堂)이 있으며, 추사 고택(秋史故宅)은 예산군에서 수리·복원하여 관리사무소를 두고 있다. 또한 예산 신암면의 입향조인 월성위 김한신묘, 화순옹주 홍문등이 용궁리에 있다.
일명 추사 고택이라고도 하는 김정희 선생 고택은 추사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면서 하사받은 저택으로, 조선 후기 서예가이며 금석학자인 김정희가 태어난 곳이다. 김정희 선생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영정을 모셔 놓은 영실(影室)로 구성되어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월성위 김한신묘는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다. 김한신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화순옹주는 식음을 끊고 슬퍼하다 세상을 떠났다. 현재 묘역에는 김한신과 화순옹주가 합장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이라 하더라도 묘막을 설치할 수 없었으나 정조(正祖)가 특별히 하사하여 김한신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달랬다고 한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화순옹주 홍문은 조선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려 정조가 하사하였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라는 자신의 뜻을 저버린 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화순옹주 홍문이 있는 묘막 터는 53칸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불타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 화순옹주 홍문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