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06 |
---|---|
한자 | 鬼室福信 |
이칭/별칭 | 복신,부여복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마사리 |
시대 | 고대/삼국시대 |
집필자 | 조민희 |
몰년 시기/일시 | 663년 - 귀실복신 사망 |
---|---|
부임|활동지 | 임존성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마사리 |
성격 | 무신|왕족 |
성별 | 남 |
대표 관직 | 달솔 |
[정의]
충청남도 예산 지역에서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킨 백제의 무신이자 왕족.
[개설]
귀실복신(鬼室福信)[?~663]은 백제 말의 무장이자 왕족으로, 660년(의자왕 20) 나당(羅唐)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임존성(任存城)에서 항전하였다. 백제가 멸망하자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서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왕자 부여풍을 옹립해 당군에 막대한 손해를 주었으나 내분으로 도침을 살해한 뒤 부여풍에게 죽었다. 복신, 귀실복신, 부여복신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계]
귀실복신은 의자왕의 사촌동생이자, 무왕(武王)의 조카이다.
[활동 사항]
귀실복신의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귀실복신의 가계에 대해 『구당서(舊唐書)』 및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중국사서를 인용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귀실복신을 무왕의 조카라고 기록하였다. 일본의 역사책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귀실복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찬성씨록』에는 귀실이라는 성씨에 대해 원래 부여씨(扶餘氏)였으나 귀신의 감화를 받아 성을 귀실(鬼室)로 고쳤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 왕족이었던 복신의 가계가 어느 시점부터 부여씨에서 갈라져 나와 분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귀실복신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구당서』 백제전이다. 복신이 627년(무왕 28) 8월 무왕의 사절로 당에 파견되었을 때 관위는 달솔이었으며, 이때 당 태종은 복신과 고구려의 사신을 불러 신라 공격을 그만두라는 조서를 내렸지만 백제가 바로 이듬해인 628년 2월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귀실복신은 임존성의 성주로 부임하였으나 의자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근친 축출 과정에서 젊은 장군 흑치상지에게 성주 직위를 넘겨주었다. 660년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의자왕이 신라에 항복하자, 도침과 함께 주류성을 근거로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서북부 지방 백제 유민들의 호응을 얻어 한때 사비성까지 쳐들어가 당군을 완전 고립시키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사비성에서 포위되자 당나라는 유인궤(劉仁軌)를 급히 파견하여 구원케 하였다. 신라 문무왕의 친정까지 겹쳐 사비성 부근의 20여 성이 다시 나당연합군에 항복하여 백제 부흥군의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귀실복신 등은 임존성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백제 부흥군은 신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는 틈을 타서 대전 부근의 옹산성, 사정성, 진현성 등을 공격하여 이를 탈환하였다. 그 밖에 신라군이 금강 상류를 통하여 식량을 수송하려 하자 이를 차단하니 나당연합군을 한때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당나라의 증원군이 도착하고 신라의 김유신이 대전의 옹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전세는 백제 부흥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여기에 더하여 귀실복신이 부여자진과 도침을 처형하는 등 병권을 둘러싼 내분으로 백제 부흥군의 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결국 귀실복신도 부여풍의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3년여를 끌어 온 백제부흥운동도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