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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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奉吉 |
이칭/별칭 | 윤우의(尹禹儀),매헌(梅軒)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최명진 |
출생 시기/일시 | 1908년 - 윤봉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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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8년 - 윤봉길 덕산보통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19년 - 윤봉길 덕산보통학교 자퇴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윤봉길 농촌 계몽 및 야학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 윤봉길 부흥원, 월진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윤봉길 만주 망명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 윤봉길 상하이 도착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04월 29일 - 윤봉길 한인애국단 입단하여 천장절 기념식에 폭탄 투척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12월 19일 - 윤봉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윤봉길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 |
출생지 | 윤봉길 출생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 |
거주|이주지 | 윤봉길 거주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5 |
학교|수학지 | 덕산보통학교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읍내리 348-1 |
학교|수학지 | 최병대 서당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
학교|수학지 | 오치서숙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
활동지 | 윤봉길 활동지 - 충청남도 예산군 |
활동지 | 윤봉길 활동지 - 중국 상하이 |
묘소 | 윤봉길 묘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윤봉길(尹奉吉)[1908~1932]은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이 열린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지금의 루쉰공원]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르고 체포되어 일본의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가계]
윤봉길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본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이다. 아버지는 윤황(尹璜)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慶州金氏)이다.
[활동 사항]
윤봉길은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시량리 솔밭 뒤에 있던 최병대(崔秉大)의 글방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한학을 공부하였고, 열네 살 때는 인근 마을의 서당인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유학자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문하생으로 공부하며 사서삼경 등 중국고전을 익혔다.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친 이후에는 농민 계몽·농촌 부흥 운동·독서회 운동 등 농촌 부흥에 전력하며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하였고, 야학회를 조직하여 향리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 부흥 운동을 본격화하였는데, 부흥회에서 공연한 촌극인 「토끼와 여우」가 성황리에 끝나면서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윤봉길은 굴하지 않고 지방 농민들을 규합하여 자활적 농촌 진흥을 위한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였으며,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운영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30년 3월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가니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편지를 남긴 채 만주로 망명하던 윤봉길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결국 만주로 탈출해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과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1931년 8월 활동 무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옮겨 동포 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상하이 영어학교에서 수학하는 한편, 노동조합을 조직한 뒤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해 겨울부터는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도쿄에서 일본 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며 상하이의 정세가 복잡해지자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윤봉길의 거사로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상하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이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수류탄 투척 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이후 1932년 11월 20일 오사카형무소에 수감, 1932년 12월 19일 총살되었다.
[저술 및 작품]
윤봉길의 저술인 『농민독본』은 농민 구제와 농민 부흥의 뜻을 밝혀 민족정신과 자주·자립정신을 일깨우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본래 3권이었으나 현재 2권만이 남아 있으며 인쇄물이다.
[묘소]
윤봉길은 1932년 일본에서 총살된 후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해방 후 유해봉안추진위원회의 주도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여 서울특별시 효창동의 효창공원에 국민장으로 안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 윤봉길의 고향인 예산군 덕산면에 충의사가 세워졌으며, 1972년 생가와 고택 및 충의사경역이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이란 명칭으로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1987년 윤봉길 의거 55주년을 기념해 국민 성금을 모아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양재 시민의 숲에 매헌기념관을 세웠다. 홍커우공원 폭탄 투척 사건이 있었던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루쉰공원]에도 기념관 매정(梅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