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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치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33
한자 圖馬峙戰鬪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유마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07년 1월연표보기 - 고광순 의병 부대 조직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7년 4월 26일연표보기 - 도마치 전투 발생
발생|시작 장소 도마치 전투 -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유마리 지도보기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고광순|고광순 부대

[정의]

1907년 4월 26일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유마리에 있는 고개인 도마치 일대에서 고광순 의병 부대와 관군 사이에 일어난 전투.

[개설]

도마치 전투고광순 부대가 화순군 화순 읍내를 습격한 다음날인 1907년 4월 26일 일어났다. 관군은 고광순 부대의 이동로인 도마치 고개에 매복하여 공격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고광순 부대에 얼마간 병력 손실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고광순 부대의 주력은 건재해 이후 1907년 말까지 무장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역사적 배경]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1895년(고종 32) 명성 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항일 의병 운동이 시작되었다. 초기의 의병 운동은 주로 오랫동안 위정척사론을 주창해 온 지역의 명망 있는 인사들이 주도했으나 정부의 설득과 강경 진압으로 단기간에 끝났다.

1906년(광무 10) 전라도 태인 지역[현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에서 최익현을 수장으로 다시 의병이 결집하였으나 이번에도 큰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1906년(광무 10) 무렵에는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었고, 의병 봉기를 준비해 온 역량도 성숙해 있었다. 전라남도 각지에서는 1906년(광무 10)과 1907년(광무 11) 사이에 지역 단위로 독자적인 의병 부대가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경과]

1907년(광무 11) 1월 당시 창평군에 살던 고광순은 오랫동안 이곳의 거족이었던 일족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의병 부대를 결성했다. 고광순의 부대는 때마침 전라북도 남원 지역에서 거병한 양한규의 부대와 합세하여 2월 중 남원 읍내 공격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의병 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고광순 부대가 남원에 접근할 무렵 양한규 부대가 와해되면서 남원 읍내를 공격하려는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럼에도 고광순 부대는 부대의 편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전라남도 동북부 지역의 험준한 산악을 발판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4월 25일 화순 읍내를 급습하여 관공서와 일본인 점포를 소각하는 등 위력을 과시하였다.

도마치화순군 남면 유마리다산리 사이에 있는 해발 300여 m의 고개이다. 북쪽으로부터 백아산모후산 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속한 도마치 고개는 주변이 울창한 숲과 산세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전날 급습한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 읍내와는 도로상 20여 ㎞ 떨어진 거리이기도 했다. 고광순 부대는 화순 읍내를 급습한 뒤에 도마치 동쪽 700m 거리인 유마사에 머물렀던 것 같다.

이처럼 고광순 부대는 사찰을 은신처로 삼곤 하였는데, 이는 고광순 부대의 이동로가 산악 지대이고 병력 규모도 적지 않아 민가나 작은 마을에 유숙하기에는 번거로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산 중에 있는 사찰이 지닌 은밀성도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관군은 이런 특성을 알고 도마치 고개 일대에 매복하여 공격을 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마치 전투에서 고광순 부대는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병력은 매복과 포위 공격을 뚫고 산중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결과]

도마치 전투 이후에도 고광순 부대는 소백산맥의 험준함에 기대어 계속 유격전을 전개했다. 병력 충원도 빠르게 이루어져 그해 8~9월에는 1천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병력 충원은 일부 모병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주로 김동신 등 다른 부대의 합류에 따른 결과였던 것 같다.

고광순 부대의 활동도 더욱 활발해졌다. 9월에는 전라남도 구례 읍내를 습격했고 10월에는 경상남도 하동 지역의 경찰 분견소와 전라남도 순창 지역의 우편국을 습격했다. 이 무렵 고광순 부대는 근거지도 확보했는데 크게 보아 지리산 남쪽 일원의 구례와 하동 지역이었다. 특히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의 연곡사,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의 칠불사를 주요 활동 거점이자 병참 기지로 삼았다.

1907년 10월 지리산 연곡사 계곡, 즉 피아골에서 고광순 부대는 관군과 큰 접전을 벌였고, 이 전투에서 고광순이 전사하였다. 비록 피아골 전투로 고광순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나 생존한 휘하 의병들은 일본군이 2개 연대를 투입해 전라남도 지역의 의병을 일소하려고 한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 때까지 독자적으로 활동하거나 혹은 다른 의병 부대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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