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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운주사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602
한자 和順雲住寺址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용강리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최인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4년 5월 15일연표보기 - 화순 운주사지 전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제1차 발굴 조사 시작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4년 6월 16일 - 화순 운주사지 전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제1차 불적 조사 시작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4년 6월 20일연표보기 - 화순 운주사지 전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제1차 발굴 조사 종료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4년 8월 15일 - 화순 운주사지 전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제1차 불적 조사 종료
문화재 지정 일시 1985년 4월 15일 - 화순 운주사지 사적 제312호로 지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7년 9월 12일연표보기 - 화순 운주사지 전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제2차 발굴 조사 시작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7년 11월 10일연표보기 - 화순 운주사지 전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제2차 발굴 조사 종료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9년 2월 20일연표보기 - 화순 운주사지 전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제3차 발굴 조사 시작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9년 3월 30일연표보기 - 화순 운주사지 전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제3차 발굴 조사 종료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9년 9월 18일연표보기 - 화순 운주사지 전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제4차 발굴 조사 시작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9년 11월 14일연표보기 - 화순 운주사지 전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제4차 발굴 조사 종료
소재지 운주사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용강리 일원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전남 대학교 박물관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300]
출토 유물 소장처 국립 광주 박물관 - 광주광역시 북구 하서로 110[매곡동 430]
성격 절터
소유자 운주사
관리자 운주사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제312호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용강리 일원에 위치한 운주사의 절터.

[개설]

운주사는 천불산에 자리하며 송광사의 말사이다. 운주사운주사(運舟寺)·운주사(運柱寺)·운주사(雲柱寺)·운주사(雲住寺) 등으로 불린다. 운주사(運舟寺)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 후기 풍수지리 사상에 근거해 우리 한반도는 배의 형국이기 때문에 그 운세가 일본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풍수론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천불산에 있다. 좌우의 산등성이에 일천의 석불과 석탑이 있다. 또 석실이 두 개가 있는데 석불은 서로 등을 지고 앉아 있다”라는 기록이나 고려 시대 암키와의 명문인 ‘운주사환은천조(雲住寺丸恩天造)’ 등에서 지금과 마찬가지로 ‘운주사(雲住寺)’로 적고 있음이 확인된다.

[위치]

운주사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에 있는 천불산에 자리하고 있다. 유적에 이르는 길은 화순군 능주면에서 도곡면 평리 방향으로 지방도 822호선을 타고 가다가 평리 사거리에서 지방도 817호선을 갈아타고 도암면 소재지에 이른다. 다시 사거리에서 지방도 818호선을 타고 가다가 도암면 용강리 삼거리에서 운주사 방향으로 1㎞ 정도 가면 된다.

[변천]

지금까지 운주사의 창건은 9세기 도선 국사에 의한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1989년 전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시행한 종합 학술 조사 결과 운주사의 창건주는 고려 시대 혜명(惠明)일 것이란 가설이 제시되었다. 이는 1656년(효종 7)에 간행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의 기록을 근거로 하는데, “전하기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하며 혹은 고려 승 혜명이 무리 수천으로 하여금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라고 기록된 점에 주목한 것이다. 여기에 기록된 혜명은 고려 초 광종 때 관촉사의 석불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혜명과 동일인으로 제기되어 운주사의 발굴 조사 결과와 부합되어 설득력을 가진다. 또 현재 남아 있는 석불과 석탑의 양식이나 가람터의 발굴 결과도 도선이 활동하던 9세기와는 거리가 멀지만 『일봉암기(日封庵記)』에 충청남도 논산시의 대인 석상(大人石像)과 운주지곡(運舟之谷)의 천기의 불탑을 비보 사상으로 보고 있어 비록 도선의 창건은 아닐지라도 비보 사상에 근거한 사찰임은 분명하리라고 본다.

그간의 발굴 조사 결과 11세기 초에 창건되었고, 12세기 말에 이르러 가람이 완비되었으며, 4차례의 중수를 거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유재란운주사는 방화로 완전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설담자우(雪潭自優)가 불상과 불탑을 수리하고 약사전을 건립하여 일부 사역을 중창하였는데 조선 후기까지 이 절은 약사사(藥師寺)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또 다시 폐사되었다가 1918년에 인법당 형태의 조그만 요사가 들어섰고 1980년대 이후 대대적인 중창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운주사에는 100여 개의 불상과 30여 기의 석탑, 칠성 바위가 전하며 골짜기 여기저기에 석불·석탑 제작 과정을 보여 주는 유적들이 널려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운주사에 대한 발굴 조사는 전남 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984년부터 1989년에 이르기까지 6년에 걸쳐 4차례 진행되었다. 제1차 발굴 조사는 1984년 5월 15일~6월 20일까지 35일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불적 조사는 6월 16일~8월 15일까지 석불·석탑에 대한 실측 조사를 병행하였다. 현존하는 18기의 석탑 및 81구의 석불 중 상태가 양호한 34구의 불상에 대한 양식적인 검토가 이루어졌으며, 개별적인 실측 도면이 처음으로 완성되었다는 데 그 의미가 크다.

이 발굴 조사에서는 지금까지 ‘운주사(雲舟寺)’로 불리던 절 이름이 ‘운주사환은천조(雲住寺丸恩天造)’명의 암키와 출토로 인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대로 운주사(雲住寺)였음을 확인했다는 데 그 성과가 크다. 건물지에 대한 조사에서는 17세기~19세기의 절터, 석불군 주변의 조사에서는 고려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 여래 입상 1구가 발견되었다.

제2차 발굴 조사는 1987년 9월 12일~11월 10일까지 60여 일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용강리 지구에서는 제1차 발굴 조사를 토대로 운주사의 전체적인 가람 배치의 규명에 맞추었다. 용강리 건물지에서 12세기에 창건된 이후 두 차례의 중수를 확인하였다. 석불·석탑의 조성 연대가 12세기경으로 추정되듯이 발굴 조사 시에 출토된 유물 역시 이 시기를 상한으로 하는 것으로 보아 운주사는 12세기에 창건되어 2차례의 중창을 거듭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특히 ‘홍치(弘治) 8년[1495년]’ 명 암막새 기와의 출토로 정확한 중창 연대가 파악되었다.

제3차 발굴 조사는 1989년 2월 20일~3월 30일까지 40일 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2차에 조사한 용강리 건물지를 재설정하여 미비점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이번 조사에서는 중심축이 남서 30° 방향인 건물지와 10세기 후반의 것으로 여겨지는 해무리굽 청자편이 원토층에서 출토되어 운주사의 창건 시기 및 가람 배치에 대한 견해를 수정해야 했다. 아울러 새로운 기단이 확인되어 당초 파악된 3개의 기단 외에 사역이 최남단에 또 하나의 기단 존재가 파악되었다.

새로운 유구와 유물의 확인으로 종래에 12세기로 추정 되었던 운주사의 창건 연대를 11세기까지 올려볼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운주사는 11세기에 창건된 사찰로 모든 기능을 갖추게 되는 12세기에 이르러 중심 축선이 바뀌는 대규모의 불사를 거치는 등 4차에 걸친 중창을 거듭하다가 정유재란 시에 폐사에 이르렀음이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약 600년 간의 존속 기간도 산정이 가능해졌다.

제4차 발굴 조사는 1989년 9월 18일~11월 14일까지 60여 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번 조사는 운주사 전역에 걸쳐 건립되었던 건물지의 추정 지역과 석탑·석불 주변의 조사를 통하여 정화 복원 사업의 기초 자료를 제공할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원구형 석탑의 서편에서 건물지의 유구를 확인하였으며, 17~18세기의 자기편과 옹기편이 다량 출토되어 근년에 이르기까지 생활하였던 유적으로 파악되었다.

대웅전의 남쪽 지역과 서쪽의 경작지를 조사한 결과 전자의 지역에서 장방형 지대석 1매가 확인되었으며, 이 주변에서 원형의 탑재 6개가 출토되었다. 아울러 7층 석탑의 주변을 조사한 결과 장방형의 판석을 사용하여 탑구(塔區)를 설치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석불군 조사 중 통일 신라 하대로 추정되는 금동 보살 입상(金銅菩薩立像) 1구가 출토되었다.

[현황]

1980년대 중반까지는 허름한 요사채만 남아 있었으나 이후 건물을 신축하여 지금은 정면 3칸의 대웅전을 비롯해 요사채, 지장전, 종루, 승방 등 9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 좌우의 산등성이에 1,000개의 석불과 석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942년까지는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탑 12기와 석불 70기만 남아 있다. 크기는 10m 이상의 거구에서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매우 투박하고 사실적이며 친숙한 모습이 특징이다. 1980년 6월에는 절 주변이 문화재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었다가 1985년 4월에는 사적 제312호 지정되었다.

현재 문화재로는 연화탑, 굴미륵 석불, 보물 제796호인 화순 운주사 구층 석탑, 보물 제797호인 화순 운주사 석조 불감, 보물 제798호인 화순 운주사 원형 다층 석탑, 화순 운주사 와형 석조 여래불 등이 있다. 운주사의 천불 천탑은 우리 국토의 지형을 배 형국으로 파악한 도선이 배의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호남이 영남 보다 산이 적어 배가 기울 것을 염려하고 이곳에 1,000개의 불상과 불탑을 하룻밤 사이에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잘 알려진 와불은 천불 천탑 중 마지막 불상으로 길이 12m, 너비 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의 조각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