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화순 오성산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673
한자 和順烏城山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서성리|백용리|화순읍 일심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인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01년 12월 13일연표보기 - 화순 오성산성 전라남도 기념물 제193호로 지정
현 소재지 화순 오성산성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화순읍[서성리|백용리|일심리지도보기
성격 성(城)|산성
양식 테뫼식
관련 인물 최경운(崔慶雲)|박명순(朴明淳)
크기(높이,길이,둘레) 약 650m[길이]
소유자 화순군
관리자 화순군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남도 기념물 제193호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화순읍의 경계의 오성산 일대에 위치한 산성.

[개설]

산성은 산세를 따라서 산에 쌓은 성으로 특히 우리나라에서 잘 발달되어 현재 중부 이남에만 1,200여 개의 산성터가 남아 있다. 산성은 평상시에 군창(軍倉)을 두고 여기에 곡식과 무기를 준비하여 두며 적이 침입하면 평지의 주민들을 모두 들어오게 하여 농성하는 곳이다. 성이 위치한 지형에 따라 테뫼식, 포곡식으로 구분한다.

화순 오성산성은 1597년 정유재란 때 화순 지역 출신의 진사 최경운(崔慶雲)[1525~1597]이 향민과 가솔 및 노복 등 500여 명을 거느리고 왜군 3,000여 명과 3일간 격전을 펼치다 전사한 곳이다. 산 정상에는 이를 기리기 위한 진사 최공 경운 전망 유허비가 서 있다. 1782년(정조 6년)에 조정에서 명장들의 고적을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어명이 있자 화순 현감으로 있던 박명순(朴明淳)이 오성산 싸움터의 도면을 그려 「오성산 최경운 전망 유허도」라는 이름으로 올렸다. 후에 판서 이석규가 박명순 현감과 함께 오성산에 올라 시를 읊어 최경운의 전몰을 애통해 하였고, 현감 박명순이 진사 최경운 전망 유허비를 세웠다.

[위치]

화순 오성산성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동면 서성리 오성 마을이 있고, 남으로는 동면 백용리 백동 마을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화순, 동쪽으로는 동면 서성리가 있다. 화순읍에서 국도 22호선을 따라 1㎞쯤 가다 보면 화순읍 만연리에서 발굴 조사된 고인돌들을 이전 복원한 삼거리에 이른다. 여기서 동쪽으로 임심제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양계장에 이르게 되는데, 양계장 남쪽의 오성산 능선 상에 오성산성이 있다.

[건립 경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능성현 산천조에 “오성산은 현의 동쪽 8리에 있다. 옛 성이 있는데 3면이 모두 석벽이고 산 동쪽에 땅이 있으니 이곳을 옥동이라 한다.”라고 한다. 그런데 『여지도서』[1760] 화순현 산천조에는 오성산(吳城山)이 ‘오성산(烏城山)’으로 음은 그대로인 채 한자 표기가 바뀌었으며, 고성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지지』[1865] 능주 성지조, 『여지도서』 편찬자들이 본래 ‘오성산(吳城山)’이던 것을 화순의 별호인 ‘오성(烏城)’을 따서 개명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후 읍지와 현재의 지도에는 모두 ‘오성산(烏城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오성산의 고성에 대하여 『대동지지』[1864] 화순현 성지조에는 오성(烏城)이라 하였고, 일제 강점기 『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에 오성산성이라고 한 이래 지금까지 오성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이상의 기록들은 오성산성의 위치 정도만을 담고 있을 뿐 오성산성의 축조 시기와 배경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성산성의 유래를 더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오성산에 고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성황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오성산성은 화순 지역의 수호성이었음이 분명하다.

[현황]

성터의 흔적은 동남쪽으로 축성한 흔적이 보일 뿐 남아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남아 있는 성벽을 볼 때 산 경사면을 깎아 내거나 또는 자연 지세를 이용하였고 대부분 자연석을 가공하여 4~5단으로 축조하였다. 동벽은 능선 사면을 이용한 것이다. 산 경사면을 깎아낸 후 자연석을 가공하여 축조하였다. 성벽은 경사면을 깎아낸 후 한쪽만을 축조한 편축 벽이다. 남벽은 건물지 앞의 능선 사면을 이용하여 축조하고 있다. 성벽은 내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4~5단의 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남벽의 일부는 산 경사면을 깎아낸 후 양쪽에 돌을 축조한 협축인데 성 돌은 자연석을 가공한 것을 사용하고 있다. 서벽은 능선을 이용하여 축조하고 있다. 가파른 능선을 깎아낸 후 자연석을 가공한 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하고 있다. 성벽은 현재 노출되어 있지 않지만, 능선상에 산재되어 있는 돌로 보아 성벽이 매몰된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는 능선을 따라 돌아가는 산성의 연결선만 추정할 수 있다. 북벽은 가파른 능선과 절벽을 이용하고 있다. 가파른 능선을 다듬은 후 부분적으로 성벽을 쌓고 있는데 자연 지세를 잘 이용하고 있지만 대부분 훼손되어 있다. 성벽 주변 일대에서는 회백색·회청색 등 경질 암기와편과 회백색 등의 경질 토기, 연질 토기가 상당량 출토되었다.

문지는 남벽에 추정되는 지점이 있으나, 크게 훼손되어 특별한 시설은 남아있지 않지만, 성벽 중간에 통로를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건물지는 남벽 안쪽 능선 사면에 있는데 높이 250m 지점에 해당된다. 능선이 내려오다가 비교적 평탄한 면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는 민묘들이 자리 잡고 있지만 주변에서 많은 기와편과 토기편이 수습되어 원래는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지 범위는 40×10m의 반원형을 띠고 있으며 앞에는 길게 석축이 조성되어 있다.

건물지 앞쪽의 석축 밑에 우물이 있다. 우물은 산 경사면을 깎아낸 후 돌을 이용하여 축조하고 있다. 그 형태는 타원형으로 내부에 5~6단의 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앞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길이 1.0m, 너비 0.5m이다.

산 정상부에는 진사 최공경운 전망 유허비(進士崔公慶雲戰亡遺墟碑)가 있고 ‘숭정 오년 경인 십이월(崇禎午年庚寅十二月)’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는데 숭정 오년(崇禎 午年)은 1632년이고, 경인년은 1650년·1710년 등이어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기념비의 내용은 최경운선조 대인 임진년에 난이 일자 두 아우와 상의하여 의병청을 화순 삼천리에 설치하고 고경명·박광옥 등에게 글을 보내 의병 1,000여 명을 모았으며 큰아들은 금산으로 보내 고경명을 돕게 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오성산성의 길이는 약 650m로 작은 규모이다. 화순 지역의 여타의 산성처럼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성을 축조 하였으며, 비교적 낮은 고도인 250~270m 위치에 자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현재 자연석을 이용한 석벽은 토사가 쌓이고 나무가 자라서 점점 무너지고 있는 실정이다. 2001년 12월 13일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성격]

화순 오성산성은 높이 290.4m인 오성산의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능선이나 절벽을 이용하고 있는데 해발 250~270m 일대에 위치하고, 대부분 주변의 돌을 가공하여 축조하였다. 성돌 들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연석을 가공하여 이용하고 있다. 성벽 기단석은 큰 돌로 사용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사용하고 있다. 성벽의 축조는 대부분 산 경사면을 깎아낸 후 한쪽 면만을 축조한 편축법으로 이루어졌다. 큰 성돌 사이에는 작은 돌을 끼워 넣어 큰 성돌들이 움직이지 않게 하여 안정감 있게 축조하였다.

난이 발생했을 때 읍에서 피난하기 위한 곳으로 여겨지므로 목적에 따라서는 군사적인 피난성, 지형에 따라서는 산성, 지리적 위치에 따라서는 내륙성, 축조 재료에 따라서는 석성, 평면 형상에 따라서는 폐합부정형성, 중복도에 따라서는 단곽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구체적인 축조 시기나 배경과 관련된 문헌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화순읍에 가까운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유사시에 즉시 입성하여 방어나 역습 등을 할 수 있는 전형적인 배후 산성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