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양재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1023
한자 梁在慶
이칭/별칭 여정(汝正),희암(希庵)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수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9년연표보기 - 양재경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양재경 한후정 건립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양재경 송사 기우만의 거의 소식을 듣고 아들을 보냄
몰년 시기/일시 1918년연표보기 - 양재경 사망
출생지 양재경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쌍봉 지도보기
수학|강학지 한후정(寒後亭)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쌍봉 지도보기
성격 문인|학자
성별
본관 제주(濟州)

[정의]

근대 화순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여정(汝正), 호는 희암(希庵). 학포 양팽손(梁彭孫)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양귀모(梁龜模)이며, 아버지는 양준묵(梁俊默)이고, 어머니는 하동 정씨(河東鄭氏) 정승렬(鄭承烈)의 딸이다.

[활동 사항]

양재경(梁在慶)[1859~1918]은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여 스승에게 나아가 수학할 때 요지를 해득하고 송독함에 있어서는 물이 흐르는 것처럼 막힘이 없었다.

1876년(고종 13) 병자 수호 조약(丙子修好條約)이 이루어졌을 때는 통탄스런 마음을 시로 지어서 뜻을 표현하였다. 1880년 1월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만나기 위해 광주까지 갔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남겼다.

아버지의 명을 따라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완물 상지(玩物喪志)[하찮은 데에 정신이 팔려 큰 뜻을 잃음]라는 깨우침을 내세워 과거 응시를 포기해 버렸다.

1882년에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소식을 듣고 기사를 지었고, 1884년 갑신 정변 소식을 듣고 또 기사를 서술하였다. 1895년 왜병이 대궐을 침범하여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는 변이 있어서 각 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장성에서 창의하였을 때 자신은 상중이라 큰아들 양회인(梁會寅)을 보내어 돕도록 하였다.

한편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 운재(雲齋) 최영조(崔永祚) 등과 경전의 뜻을 강마하여 학문이 정수하였다. 1902년에는 단성의 신안 정사(新安精舍)에 가서 노사집(蘆沙集)을 간행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영남 사람 권봉희와 최동민 등이 통문을 보내어 노사집의 목판을 훼손하려고 하자 세상의 변괴라고 하면서 「우기(偶記)」 등을 저술하였다.

천성이 효성스러워서 어버이의 병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유지에 비석을 세우고 선세(先世)의 유묵을 잘 간직하고 계승한 공이 크다. 1905년에 쌍봉리 쌍봉 마을 뒤편에 한후정(寒後亭)을 세우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을사늑약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토역문(討逆文)을 지어 동지들에게 보였으며, 경술년 국치를 당해서는 통분하여 풍천(風泉)의 감회를 서술하였다.

[학문과 저술]

유집에 『희암 유고(希菴遺稿)』 13권 3책이 있다.

[묘소]

묘는 전라남도 보성군 미력면 은곡(隱谷)에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