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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1501
한자 綾州鄕校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교촌길 36[남정리 328]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윤희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392년연표보기 - 능주향교 창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600년연표보기 - 능주향교 중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611년 - 능주향교 동무 및 서무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632년 - 능주향교 중설위로 승격
개축|증축 시기/일시 1872년 - 능주향교 대대적 중수
문화재 지정 일시 1985년 2월 25일연표보기 - 능주향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능주향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8년 - 능주향교 사마재 개축
현 소재지 능주향교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교촌길 36[남정리 328]지도보기
성격 향교
양식 홑처마 맞배지붕
정면 칸수 5칸[대성전]
측면 칸수 3칸[대성전]
소유자 전라남도 향교 재단
관리자 능주향교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있는 조선 시대 지방 교육 기관.

[위치]

능주향교는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교촌길 36에 위치하고 있다. 능주 면사무소 뒤쪽으로 약 2㎞ 떨어져 있으며, 화순군청에서 부터는 약 12.5㎞ 정도 거리이다.

[변천]

능주향교는 조선 시대 능주 고을에서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고을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설립한 지방 교육 기관이다. 능주향교의 설립 시기는 1923년에 편찬된 『능주 읍지』에는 1392년이라 되어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에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1416년(태종 16)에 능성현화순현을 합쳐 순성현으로 개칭하였다가 2년 뒤에 다시 분리되어 능성현이 되었다. 아마도 능주향교가 건립된 것은 고을 개편이 되던 시기와 그리 멀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향교는 관학 기관이기에 관아 근처에 자리 잡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능주향교의 위치는 아마도 현재의 위치라 추정된다.

창건 이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임진왜란으로 향교가 불탔고, 1600년(선조 33)에 현령 하응도(河應圖)의 주선으로 중건되었다. 1611년(광해군 3)에 동국 5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문묘 종사가 결정되어 전국의 향교에 이들의 위판을 봉안하게 되었다. 이에 능주향교에서는 현령 윤수(尹燧)의 주관 아래 동국 5현의 위패를 봉안할 동무와 서무를 창건하였다.

능주향교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 것은 1632년(인조 10)이다. 인조의 어머니인 인현왕후 구씨(具氏)의 본관이 능성이라는 이유에서 능성현능주목으로 승격한 것이다. 이에 능주향교의 규모가 소설위에서 중설위로 승격하여 선현의 배향 규모도 확대되었다. 1647년(인조 25)에 소설위에는 없는 공자의 수제자 10철의 위패를 만들어 봉안한 것도 목으로 승격한 것에 따른 것으로 중설위로 격상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아울러 교생의 정원이 30명에서 90명으로 늘어나고 향교에 지급되는 향교전과 노비의 규모도 늘어났다. 이후 1716년(숙종 42)에 대성전·동무·서무의 보수, 1724년(경종4) 목사 이지영(李之榮)의 중수, 1775년(영조 51) 목사 이광도(李廣度)의 중수가 있었다.

흥선 대원군서원을 철폐하면서 향교의 기능을 강화하고 운영의 쇄신을 추진하였는데, 그러한 조치에 따라 1872년(고종 9) 목사 한치조(韓致肇)와 능주 유림의 협력으로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의 개수 등 능주향교 전반에 걸친 정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1890년에 목사 김승집(金升集)이 중수하고,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능주향교의 중수와 중건은 계속되고 있다.

조선 후기에 향교 교육의 쇠퇴를 만회하기 위하여 각 고을에서는 양사재라는 별도의 교육 기관이 건립되었다. 능주도 1719년(숙종 45)에 목사 임상덕(林象德)의 주선으로 향교 동쪽 바로 옆에 양사재[동양사재라고도 한다]가 건립되었다. 양사재에서는 매년 재생을 선발하여 공부를 시켰는데 능주향교에는 1741년부터 1894년까지 공부한 학생들의 명단이 남아 있어 활발한 교육 활동을 짐작케 하고 있다. 그리고 원접청이라는 또 다른 양사재가 1779년에 목사 여선덕(呂善德)의 주선으로 향교 서쪽에 건립되었다[서양사재라고도 한다]. 원접청도 1780년부터 1895년까지의 학생 명단이 남아 있어 능주 고을의 교육 활동이 활발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양사재 두 개가 있는 곳은 능주향교가 유일하다. 능주향교 동쪽 가까이에 양사재가 있었으나 1998년에 사마재라는 이름으로 개축하였다.

1912년에 동무를 중건하였고, 1923년 대성전·동무·명륜당·서재를 중수하고 동재를 중건하였다. 1953년과 1956년, 그리고 1975년에도 향교를 보수하였다. 이후 1978년에 대성전·내삼문·정문을 단청하였고, 1979년에는 홍문을 복원하였으며, 명륜당·동재·서재를 보수하고 단청하였다. 또 1989년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보수하였고, 1991년에는 동무를 보수하였으며, 1992년에는 고직사를 보수하였다. 1993년에 화장실을 신축하였고, 1994년에는 계단을 보수하였으며, 1995년에 명륜당을 보수하였다. 1996년에 대성전을 보수하였고, 1997년에 대성전과 내삼문을 보수하였으며, 중문을 개축하고 외삼문을 복원하였다. 1998년에는 사마재를 개축하였다. 1985년 2월 25일에 전라남도 지방 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능주향교는 언덕에 위치한 전형적인 ‘전학 후묘’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향교가 있음을 알려주는 홍살문을 지나면 외삼문이 나오는데, 외삼문 전면으로는 20단의 계단이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동재가, 좌측으로는 명륜당 측면과 이어져 있으며, 지형상 명륜당 후면은 막돌 석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명륜당 측면과 동재, 맞은편에 서재가 있어 강학 공간을 이루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단층 강당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내부는 양 단칸으로 온돌방을 배치하고 중앙으로는 우물마루를 깐 대청으로 꾸몄다. 동재는 정면 2칸 반, 측면 1칸 반의 맞배집이다. 정면 우측의 반 칸 폭에는 창고를 설치하고 전면에 툇마루를 놓았으며 그 안쪽으로는 온돌방을 시설하였다. 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온돌방을 들이고 앞쪽으로는 반 칸 넓이의 툇마루를 설치한 맞배집이다.

동재와 서재 사이에 11개의 계단이 있고 그 위로 내삼문이 위치하고 있다. 내삼문 안쪽은 문묘 구역으로 1.3m 높이의 기단 위에 대성전이 자리 잡고 있고, 동무와 서무는 대성전 좌우에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처마의 전면은 겹처마, 후면은 홑처마로 처리하였다. 동무와 서무는 모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전면은 반 칸 폭으로 툇간을 두었다.

사마재는 1998년에 개축하였는데 외삼문 오른쪽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중앙에 마루 2칸 양옆으로 방을 1칸씩 두었고 양쪽으로 날개를 달아 부엌으로 사용한다.

[현황]

능주향교는 매년 봄과 가을에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향교는 전라남도 향교 재단 소유이고 관리자는 능주향교로 2013년 현재 능주 지역의 유림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1985년 2월 2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능주향교는 다른 향교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다. 유안 3종 4책, 「능주목 유생 흥학 절목」[1851], 『전답안』[1805], 1917년에 작성하여 능주향교가 소장하고 있는 전적 목록을 적은 『사마재 합안』이 있고, 양사재 자료로 『양사재안』 3책[1720, 1739, 1793], 양사재에서 공부한 학생들의 명단인 『양사재정간안』 6책[1741~1908]이 있다. 또 원접청 자료로는 『원접청 유안』 3책[1779, 1813, 1860], 『원접청 정간안』 3책[1780~1895], 전답안인 『능주 서양사재행심안』[1874], 양사재에 원납한 평민들 21명의 명단을 담은 『양사재 원납안』, 양사재에 소속된 보인 명단을 담은 『양사재 별비보안』, 양사재 식리 활동을 담은 『양사재 식리기』 2책, 『양사재 절목』 4책 등이 있다. 또 능주 지역의 생원 진사 명단을 담은 『사마안』 1책, 『사마안 유사안』 1책 이외 『향음례계창설안』[1888], 『능주민고절목』[1822] 등의 관아 문서와 해방 이후 향교 중수 내력을 적은 『중수안』등 여러 책이 남아 있어 능주향교의 역사를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능주향교에 현액된 현판은 조선 시대에 작성된 4종이 있고, 향교 앞에 29개의 비석이 이전되어 두 줄로 정연하게 늘어져 있다. 이 비석들은 관찰사·목사·군수의 선정비·창덕비·영세 불망비이다.

[의의와 평가]

능주향교의 자료들을 통하여 향교의 교육 활동과 양반 유림들의 향촌 활동을 알 수 있다. 특히 양사재, 원접청의 유안과 정간안 등은 다른 지역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 특별한 관리와 관심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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