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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1498
한자 儒敎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윤희면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에서 행해지는 공자의 사상과 관련한 학문과 의례 및 활동.

[개설]

유교는 공자가 체계화한 사상을 바탕으로 삼는 학문이다. 더 나아가 종교적 관점에서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공자의 가르침, 곧 유교는 인(仁)을 최고의 이념으로 삼는다. 인간의 도리를 의미하는 인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삼강오륜의 사회 윤리가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유교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전래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 시대이다. 고려 때에는 불교가 숭상되었지만 정치의 이념과 운영은 유교에서 구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주자학이 전래되었고, 개혁을 이루려는 사대부들의 노력은 조선 왕조의 성립이라는 역성혁명으로 이어졌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정치 제도를 정비하고 사회 제도를 다져 나갔다. 성리학의 연구도 심화되어 15~16세기에 퇴계 이황율곡 이이로 이어지면서 조선의 사상으로 확실히 정착됐다. 또한 16세기의 4단 7정 논쟁, 17세기의 예학 논쟁 등을 통하여 성리학의 연구 수준을 높였다.

화순 지역의 유학을 대표하고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는 양팽손, 안방준, 유배를 온 조광조, 최산두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나라의 위험에서 구하고자 성리학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충절 인물들이 임진왜란 시기와 구한말에 많이 등장했다.

한편, 성리학이 현실과 다소 멀어지는 사상적·철학적 논변이 이어지면서 이에 대한 반성으로 18세기에는 실학의 학풍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호남을 대표하는 실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화순 지역에 거주하던 하백원[1781~1845]을 들 수 있다. 그는 벼슬을 단념하고 실용적인 학문에 몰두하여 자동 양수기인 자승거를 제작하여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지도인 「동국 전도」와 세계 지도인 「만국 전도」도 제작하는 등 새로운 학문에 대한 관심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화순 지역 유교의 전개]

1. 향교

조선 왕조는 통치 이념인 유교를 보급시키고 유교적인 소양을 지닌 관리를 양성하기 위하여 관학을 강화하였다. 군현제를 정비하면서 ‘1읍 1교’의 원칙으로 각 고을에 향교를 설치하였다. 화순 지역의 경우 화순 향교, 능주 향교, 동복 향교가 세워졌다. 갑오개혁 이후 군현의 통폐합으로 세 고을이 화순군으로 병합되면서 화순군에는 모두 3개의 향교가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향교는 제례와 교육의 2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서울에 있는 성균관의 축소형으로 공자를 봉안하는 대성전과 선현들을 봉안하는 문묘(文廟)와, 학생들을 교육하는 장소인 명륜당, 기숙 장소인 동재, 서재를 두고 있어 학교(學校) 기능을 기본 구조로 가지고 있다. 곧 향교는 유학과 유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1945년 10월에 전국 유림들이 서울의 성균관에 모여 유도회 총본부를 설립하고 전국의 유림 재산을 모아 재단을 보강하였다. 1964년 10월에는 향교 직제가 제정되었다. 향교의 임원은 전교(典校) 1명과 면별·인구별로 다수의 장의(掌議)를 두고, 2명 이내의 감사를 둔다. 전교는 향교를 대표하며 향교 내의 사무를 총괄하고, 장의는 전교의 지도를 받아 향교 사무를 담당하고 있다.

2. 서원, 사우와 인물

화순군에는 많은 서원과 사우가 건립되었다. 화순의 유교와 관련이 깊은 인물로는 조광조[1482~1519]를 들 수 있다. 기묘사화의 상징인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를 와서 사사(賜死)되었는데 그가 남긴 왕도 정치 이념, 성리학 지상주의, 군자의 행동 등은 오랫동안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그 결과 사림이 정권의 주도권을 잡은 선조 초년에 화순 유림들에 의하여 죽수 서원이 건립되었다. 한편, 조광조와 같은 해 생원시에 합격한 지우였으며, 유배지에서 함께 지내며 시신을 수습하기도 했던 양팽손[1488~1545]은 화순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이로 인해 조광조를 기리는 죽수 서원양팽손도 함께 배향되었다.

화순에 학문적 영향을 끼친 인물로 최산두[1483~1536]를 들 수 있다. 그는 조광조 등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로 동복에 유배되어 학문과 교육 활동을 하였다. 그는 문장에도 뛰어나 유성춘(柳成春), 윤구(尹衢)와 함께 ‘호남 삼걸’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사후에 동복의 도원 서원(道源書院)에 제향되었다.

화순의 유학에 기여한 인물로 안방준[1573~1654]도 있다. 안방준은 전라남도 보성군 출신이지만 말년에는 화순군 이양면에 은봉 정사를 짓고 학문과 교육 활동을 하였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행동하는 지식인인 그는 김인후, 기대승과 더불어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서인의 경향을 보였으며, 능주 도산사와 동복 도원 서원이 세워져 그의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화순 지역에는 절의를 대표하는 인물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임진왜란 때 화순 의병의 서장을 연 문홍헌[1551~1593]은 능주 교촌에서 출생하고 1582년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동복에서 군량미를 모으던 중 고경명 부대의 순절을 듣고 곧바로 최경회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부장이 되어 활동하다가 1593년 6월 진주성 2차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최경회[1532~1593]는 화순읍 삼천리 출생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담양 부사를 사직하였다. 하지만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켜 호남은 물론 경남까지 진출하여 많은 군공을 세웠으며, 진주성 2차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능주 포충사는 최경회, 문홍헌구희, 오방한 등 1555년 을묘왜변 때 순절한 조현 등 다섯 충신을 향사한 곳이다.

3. 한말 의병

화순 지역의 절의 정신은 한말 의병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능주 출신으로 1906년에 최익현을 쫒아 거의(擧義)한 문달환(文達煥), 능주 출신으로 1906년에 의병 대장이 되어 왜군을 소탕하려다가 순절한 김병도(金炳道), 1907년에 거의하여 능주와 보성, 광주의 왜군을 공격하다 전사·옥사·순절한 화순·능주 출신의 임복한·양회일·윤종섭·임상영, 그리고 화순 출신으로 보성의 안규홍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1909년에 전사한 이관회(李寬會) 등은 역사에 길이 기억될 만한 충렬 인물들이다.

한편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있는 항일 의병 유적인 화순 쌍산 항일 의병 유적은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의병들이 일제에 대항해 전투 준비를 하던 장소로 화순 의병, 호남 의병, 더 나아가 한말 의병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유적지이기도 하다. 화순 쌍산 항일 의병 유적은 2007년 8월 3일 사적 제485호로 지정되었다.

[의의]

화순 지역의 유교는 성리학의 본질이라 할 의리와 절의의 특색을 두드러진 곳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화순 지역은 대체로 서인, 노론의 성향을 나타내고는 있으나 학파와 정파에 따른 이론적 대립은 특별히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에는 절의 정신이 강하게 나타나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이는 한말 의병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화순 지역의 유학 사상에 대한 연구는 일부 인물에 국한되어 있을 뿐 전반적인 실상을 알기에는 매우 미흡한 실정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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