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008 |
---|---|
한자 | 彫刻裝飾-華麗-精巧-雙峰寺-建築物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산의로 459[증리 741]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최인선 |
[개설]
쌍봉사(雙峰寺)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소재하며, 대한 불교 조계종 제21교구인 순천 송광사의 말사이다. 당에서 귀국한 철감 선사 도윤의 주석(駐錫)으로 9산 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닦았다. 쌍봉사는 고려 시대 최씨 무인 정권의 비호를 받는 무진주[광주] 일대의 선종 대가람이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왕실의 지원을 받는 등 창건 이래 꾸준히 사세(寺勢)가 유지되어 왔지만,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사세가 꺾여 해남 대흥사와 순천 송광사의 말사에 편입되었다.
쌍봉사 경내에는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 탑(和順 雙峯寺 澈鑒 禪師塔)[국보 제57호],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 탑비(和順 雙峯寺 徹鑒 禪師 塔碑)[보물 제170호]와 3층 목탑 형식의 대웅전이 있다. 철감 선사(徹鑒禪師) 도윤(道允)[798~868]의 부도와 탑비는 통일 신라 말에 조성된 것이다. 세밀한 표현과 장엄한 장식은 당대의 역작이자 쌍봉사의 위세를 엿볼 수 있다. 법주사 팔상전과 더불어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 형식의 건축물인 대웅전은 1984년 화재로 본 모습을 잃었지만, 복원되어 조선 후기 쌍봉사의 사세를 알게 해주고 있다.
[쌍봉사의 어제와 오늘]
1. 선종의 등장과 쌍봉사
통일 신라 말기인 9세기 초반이 되면 당나라로 유학을 갔던 유학승들이 속속 귀국하게 되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선종을 받아들여 이른바 새로운 종파를 전하게 된다. 9산 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銅裏山門)을 곡성 태안사에서 개창한 적인 선사 혜철[785~861]이 839년(신라 신무왕 1)에 귀국하여 하안거(夏安居)를 지낸 곳이 쌍봉사였으니 쌍봉사가 최소한 839년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후 철감 선사 도윤의 주석으로 사세가 커졌음이 짐작된다.
도윤이 쌍봉사에 머물렀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쌍봉사에 그의 부도와 탑비가 현존하고 있어 최소한 입적하기 전에는 주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부도와 탑비는 선사가 입적한 후 문도들이 왕에게 청을 올려 시호를 받고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도윤과 그의 문도들이 쌍봉사에 있었음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진성 여왕 대 도윤의 제자인 절중이 분령군[현 낙안군]의 동림사[현 금둔사]에 주석하기 위해 쌍봉사에 들러 스승의 탑비를 참례하고 왔다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사세가 유지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9세기~10세기 쌍봉사는 견훤 세력을 후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 견훤의 통치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고, 둘째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능주가 나주의 속현으로 떨어진 데서 유추할 수 있겠다. 이때 쌍봉사는 도윤 대의 사세가 그대로 이어진 듯 보이는데, 쌍봉사 창건 비문에 “소성 연간(紹聖年間)[1094~1097] 혜조 국사(慧照國師)가 중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 건재함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쌍봉사에 주석하던 승려는 익종 선사(翼宗禪師)로 그의 제자인 묘응 대선사(妙應大禪師) 교웅(敎雄)[1076~1142]과 더불어 선종 계열의 승려였다. 이후 광지 대선사(廣智大禪師) 지인(之印)[1102~1158]이 쌍봉사에서 전륜대장(轉輪大藏)[대장경을 넣어두는 회전 책장]을 행했던 사실로 미루어 선종 계열의 사찰로 사세가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쌍봉사의 위세가 크게 높아진 것은 무인 정권기인 최씨 집권기였다. 최씨 무인 집정들은 전라도 지방에 경제적 기반이 있었으며, 전라도 지방의 불교계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최이(崔怡)는 최씨 무인 집권의 제2세로 두 아들인 만종(萬宗)과 만전을 수선결사(修禪結社) 제2세 진각 국사(眞覺國師) 혜심(惠諶)[1178~1234]에게 보내 출가시켰다. 만종은 진주(晉州)의 단속사(斷俗寺), 만전은 화순의 쌍봉사 주지로 각각 보냈다.
최씨 무인 정권은 사원 세력의 재편성과 통제, 정권의 정당화, 각계각층의 지지 세력을 포섭하고자 하였으며, 수선사 측은 최씨 무인 정권의 후원을 바탕으로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 있었기에 상호 밀접하게 협력한 것이다. 만전은 이러한 상황에서 쌍봉사 주지가 되어 활동을 하였는데, 주로 고리대 활동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또 전라도 일대의 유명 사찰에서 만전의 문도들은 고리대를 자행하여 막대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문제가 커지자 최이는 만전을 소환하고 전곡(錢穀)을 나눠주었으며, 장부를 불살라 버리는 등 처벌을 하였으나 정작 만전이나 그의 일파에게는 어떠한 처벌도 없었다.
만전이 주지를 하던 당시 쌍봉사의 사세는 대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만전 문도의 승려들의 수도 많았을 것이며, 주변 사찰에 대한 영향력도 컸을 것이다. 백성들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심지어 관에 대한 영향력도 행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려의 무인 정권은 끝이 나지만, 이후에도 전라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가진 사찰이라는 명목 하에 사세는 유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정확한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다.
3. 조선 시대의 쌍봉사와 현재
조선이 건국된 후 각 사원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 조치가 이루어졌다. 사사전(寺社田)의 지급액 축소와 사사 노비(寺社奴婢)의 몰수, 사사전 지급 사찰에 대한 지급 제한 조치로 사찰의 경제적 위치와 승려의 지위가 급격히 하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쌍봉사는 국왕의 지원을 받아서 일정한 사세를 유지하던 사찰이었다. 「쌍봉사 창건 비문」에 의하면 명 정통 연간(正統年間)[1436~1449]에 전라도 관찰사에 의해 중창을 하였으며, 세조 대[1455~1468]에 세조의 후원을 받아 조세 면제, 잡역 면제 등의 혜택을 받았다. 이후 선조 대[1567~1608]에 사세가 하락하였다. 능주의 유림들이 세웠던 죽수 서원(竹樹書院)의 속사(屬寺)가 되어 현물과 노동력을 부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유재란 때 쌍봉사는 전소되고 이후 1628년(인종 6), 1667년(현종 8), 1692년(숙종 16), 1724년(경종 4), 1787년(정조 10) 등에 중창과 중수가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숙종, 경종, 영조의 후원을 받았는데, 수탈이 계속되어 쌍봉사의 승려들이 사찰을 유지할 수 없음을 호소해 1795년에 「전라도 능주 쌍봉사 교폐 절목(全羅道綾州雙峰寺矯弊節目)」이 내려졌다. 절목에는 66개의 항목이 있는데, 그동안 쌍봉사에 대한 부담이 엄청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달리 말하면 그동안 부담을 해 올 정도의 능력도 있었다는 것이기에 사세의 규모를 생각해 볼 수 있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인 1911년에 시행된 사찰령으로 쌍봉사는 해남 대흥사의 말사로 편입하게 되었다. 해방 후 대한 불교 조계종의 성립으로 송광사의 말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4년 화재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3층 목탑 양식의 대웅전이 소실되고 말았지만, 통일 신라 말, 고려,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쌍봉사의 사세가 대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쌍봉사의 전각]
1. 3층 목탑 형식 쌍봉사 대웅전
쌍봉사의 해탈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3층 건물이 바로 대웅전이다. 쌍봉사 대웅전은 법주사 팔상전과 더불어 현존하는 희귀한 목탑 양식의 건축물이었다. 쌍봉사 대웅전은 보물 제163호로 지정되었다가 1984년 소실되어 현재는 보물에서 제외가 되었다. 화재의 와중에도 석가 삼존불과 현판은 살렸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1984년 소실된 대웅전은 1628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몇 가지 문헌을 통해 그 이전에도 목탑 형식의 건축물이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현존하는 기단의 편년이 통일 신라 후기 혹은 고려 초기임이 확인되므로 철감 선사 도윤의 주석 이후에도 사세가 유지되었으며, 목탑 형식의 건축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은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전소되어, 1628년에서야 삼층전을 중창하였다고 하였으니 분명히 조선 전기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대웅전은 평면이 정사각형인 3층 전각으로 1층에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는데, 2층과 3층은 통층으로 중심에 심주가 하나 있다. 같은 목조탑인 법주사 팔상전의 전체 모습이 윗 층으로 올라갈수록 체감이 심한 것에 비해 쌍봉사 대웅전은 각 층마다 완만한 비례를 가져 더 통일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또한 팔상전이 통간 형식으로 되어 있음에 비하여 쌍봉사의 목탑은 적층식으로 되어 있어 중국이나 일본의 목탑 형식과 유사한 구조를 하고 있다.
2. 쌍봉사 극락전
극락전은 대웅전의 뒤쪽에 위치하며, 전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인 다포계 건물이다. 커다란 덤벙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의 원형 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주고 있다. 특히 기둥은 건물에 비해 지름이 너무 커서 중층의 구조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건물의 건립 연대에 관해서는 상량문이 나오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봉안된 아미타여래 좌상이 1694년에 조성된 것으로 미루어 17세기 후반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쌍봉사의 대웅전과 극락전은 임진왜란 이후 소실된 것을 이후에 중창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은 이후에도 중수가 이루어졌는데, 소실된 형태의 원형이 1628년에 중창한 것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특히 목탑 양식의 건축물이 법주사 팔상전과 쌍봉사 대웅전이 전부인 현실로 볼 때 매번 중요하다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3. 명부전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1978년에 재건되었는데, 본래 호성전(護聖殿)이라는 정자 형태의 건물이 있었던 곳이다. 명부전의 건물은 이 자리로 옮기기 전에 ‘오백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나한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명부전의 경우 비교적 최근에 재건된 건축물이지만, 이전하기 전에 나한전으로 사용했던 건물로 그 내력이 자못 기이하다.
그 외의 건축물은 현대에 이르러 지어진 것으로 요사채와 해우소 등이 있으며, 2013년 현재도 불사가 진행 중이다.
[신라 하대 조각의 정수, 철감 선사 탑과 탑비]
대웅전을 지나 왼쪽으로 오르는 길이 하나 있다. 그 옆으로 대나무가 있어 오르는 길이 더 운치 있어 보이는 작은 소로이다. 길 끝에 다다르면 통일 신라 말에 주석한 철감 선사 도윤의 선사 탑과 탑비가 웅장한 모습으로 반기고 있다. 철감 선사의 탑과 탑비는 그의 입적 후 문도들의 주청에 의해 국가에서 최고의 문장가, 조각가 들이 참여하여 만든 수작이다.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 탑은 일제 강점기에 도굴꾼들이 사리 장치를 꺼내기 위해 쓰러뜨린 것을 1957년에 복원해 놓아 옥개석의 추녀 끝이 많이 결실된 상태이다. 탑은 상륜부가 결실되었으나 가장 아름다운 부도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장엄한 조각을 하고 있다.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 탑의 조각을 살펴보면, 우선 기단부의 하단에 운룡문을 장식하였는데, 용은 불가에서 넓게는 불법 수호, 좁게는 사리 수호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러한 운룡문은 이 탑에서 처음 나타나며, 이후 연곡사 동부도, 선림원지 부도, 실상사 수철 화상 부도에 영향을 주었다. 옥개석과 탑신은 목조 건축의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세부적인 치밀함을 보여 준다. 먼저 옥개석은 각 면에 8개의 원주형 기둥을 배흘림 수법으로 치석하였으며, 벽체의 구성 시 문을 내고 자물쇠를 표현하는 등 목조 건축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어 주목된다.
탑신부에는 정면에 창호, 측면과 후면을 벽체로 구성하였으며, 각 모서리에 배흘림 수법을 쓰고, 기둥 위에 주두를 올려 벽선을 끼우고 벽체를 만드는 등 목조 건축을 그대로 변안하였다. 또한 탑신부는 사리 봉안처로 보살상과 수호상을 각 면에 배치하여 사리를 보호하는 조각을 매우 사실감 있게 부조하였다.
주요 조각상을 열거하면 운룡문, 사자상, 가릉빈가상[극락정토에 살며 형상은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을 하고 있는 상상의 동물상, 부도에서는 처음으로 나타남], 사천왕상, 공양 비천상, 보살상 등으로 하대석부터 상륜부까지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는데, 조각사적으로 당대의 양식과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 탑의 조형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석조 부도의 발달은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 탑에 이르러 팔각 원당형 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 탑은 승려의 묘탑이라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불교 교리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형식과 양식, 제작법, 배치 방식 등 모든 면에 있어서 부도의 정형적인 기법을 보여준다. 즉 진전사지 부도→염거 화상 탑→대안사 적인 선사 탑에서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 탑으로 계승되는 양식은 철감 선사 탑에서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넷째, 현재 신라 시대 목조 건축이 전무한 상태에서 당대의 목조 가구 건축 양식을 밝히는 데 절대적인 자료이다.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 탑 왼쪽에 탑비가 있는데, 그 역시 당대 조각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비신은 유실되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어 당대 최고의 문장가의 글을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신라 하대의 탑비는 부도와 동시기에 조성하여 그 연유를 밝히는데, 이는 철감 선사가 이름난 승려로 국가에서 인정한다는 뜻이다. 문도들에 의해 왕에게 주청하여 시호를 받고, 국가의 주도로 부도와 탑비가 당대 최고의 조각가, 문장가들에 의해서 세워진다는 의미이다.
귀부는 비신을 받치고 있는 하대석으로 거북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 귀부라고 한다. 특히 거북을 표현할 때 구슬을 입으로 물고 있으며, 고개를 곧게 펴고 있는 모습, 날카로운 이빨 등으로 용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날렵한 목을 가진 거북과 왼발은 땅에 박고 오른발은 살짝 들어 올려 당장이라도 달려올 듯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이수의 전면에는 액을 만들어 ‘쌍봉산고철감선사비명’을 새겨 그 주인공을 알 수 있다. 이수에는 구름과 용을 각 면에 사실적으로 조각하였는데, 연곡사 동부도와 같은 형식이다. 이수의 끝에는 귀꽂이 세 개가 꽂혀 있는데, 현재 오른쪽 끝의 귀꽂이 유실되어 새로이 꽂았다.
철감 선사 탑과 탑비는 당시 도윤 문도들의 청에 의해 국가에서 조성한 것으로 당대 문장가, 조각가가 참여한 것으로 신라 하대 석조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