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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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農軍-牛峰里百中- |
이칭/별칭 | 우봉리 들소리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우봉리 |
집필자 | 서해숙 |
[화순의 대표 놀이, 우봉리 백중놀이]
우봉리는 춘양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자연 마을이다. 마을 서쪽으로는 지석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며 남쪽으로는 사창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는 용암산 줄기가 뻗어 있다. 이 마을 앞으로는 국도 29호선이 길게 남북으로 가로 질러 지나가며, 마을 동쪽으로는 한천면, 서쪽으로는 춘양면 석정리 돌정 마을, 남쪽으로는 용두리 용두 마을, 북쪽으로는 부곡리 부춘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7월 15일 백중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한데 어울려 백중놀이를 연행한다. 백중은 ‘머슴명절’이라고도 하는데, 이 무렵이면 과실과 소채(蔬菜)가 많이 나와 옛날에는 백가지 곡식의 씨앗[種子]을 갖추어 놓았다 하여 유래된 명칭이다.
백중 무렵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마을 앞의 넓은 들녘에서 한데 어울려 들소리를 흥겹게 부르면서 한 해 동안 농사짓는 수고스러움을 씻어낸다. 이 때 부르는 들소리가 화순에서도 유명하여 제1회 화순군 풍류 문화 큰잔치에 춘양면을 대표하여 출천하여 풍류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2008년에는 제35회 전남 민속 예술 축제[남도 문화제]에 화순군 대표로 출전하여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명실공이 전남을 대표하는 민속 예술로 주목받고 있다.
[우봉리 들소리의 전승]
우봉리 백중놀이의 핵심은 들소리이다. 들소리가 있고 없음이 곧 백중놀이가 있고 없음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들소리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부르는 소리이지만 선소리꾼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다행스럽게 이 마을에서는 고령인 홍승동[남, 90세] 선소리꾼이 있어서 여느 마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렁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농사를 짓고 살아가던 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전통적으로 들일을 할 때면 항상 노래가 뒤따랐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목청이 좋고 노래를 잘하는 사람을 선소리꾼으로 뽑아 소리를 하게 했고, 뒷소리꾼들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했다. 농사가 한창인 들녘에서 선소리꾼이 선창을 하면 뒷소리꾼들이 전체 후창을 하는 방식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협력하여 들노래를 구연하였다.
들노래는 ‘노래로 모를 키우는 과정’이라는 홍승동의 말처럼 과거에는 들노래가 갖는 민속적 의미가 컸고, 특히 백중날 구성지게 들녘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농사짓는 농부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였다. 이런 의미를 갖는 들소리가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산업화로 인해 농촌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농약과 농기계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는 홍승동을 위시해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들소리를 기억하고 오늘날에도 그대로 연행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 문화적으로 그 의미가 큰 것이다.
[우봉리 들소리의 연행]
「우봉리 들소리」는 물품는 소리, 모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 논매는 소리로 크게 구별된다. 여기에서 논메는 소리는 초벌메기 더덜기 타령, 한벌메기 세월이 타령, 두벌메기 난초 타령, 만들리 양산도 타령으로 이루어져 지역적 특성이 드러난다.
초벌메기는 모를 심은 지 20일이 경과한 후에 하는데 주로 호미질을 한다. 이는 땅을 긁어서 땅심을 돋우는데 중점을 둔다. 실제 마을 사람들이 들소리를 연행할 때 반원 형태로 서서 논메기를 해나가는데 맨 가운데 위치한 두 사람은 ‘비루’라고 하여 빠르게 앞으로 나가고 가운데에 위치한 사람들은 ‘한부리’라고 해서 비루보다는 천천히 나아간다. 논메기 행렬 뒤에는 나이 어린 소년들은 논메기를 하면서 쓰러진 모를 세우는 작업을 한다. 이를 ‘모를 춘다’고 표현한다. 이미 많이 자란 모가 땅에 쓰러지면 물에 닿아서 썩어버리기 때문에 반드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이렇게 논을 멜 때 부르는 소리의 사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어랴 어허어야 더덜기~야
허~허허야 더~덜~기~ 기야
어울러보세 어울러보세
허~야 어허허야 더~덜~기~이야
더덜기타랑을 어울러보세
허~야 어허허야 더~덜~기~이야
어울러지네(좋구나) 어울러지~네
허~야 어허허야 더~덜~기~이야
더덜기타랑이 어울러지~네
[중략]
한불메기는 초벌메기를 한 열흘 후 경에 한다. 한불메기부터는 주로 손으로 메는데 이 때 부르는 소리의 사설은 다음과 같다.
에루화~화~화~어~이 어~어어이 세~월이나 보~ 보~오세
에루화~화~어 허~어허~어허 에~월~이워리나 보~ 보~ 오세~
어울러 보세 어울러 보세~ 세월이 타령을 어울러 보~오세
에루화~화~어~어~어~어~에~월~워~리나 보~~보~세
어울러 지네 어울러지~네 세월이타랑 어울러지~네
에루화~화~어~어~어~어~에~월~워~리나 보~~보~세
잘도나 허네 다 잘도 허네~(좋구나) 우리 농부들 다 잘도 허네
[중략]
군벌메기는 한 벌을 멘 열흘 후에 한다. 그리고 다시 열흘 후 에 ‘만드리’를 한다. 이때가 백중 무렵으로 마을 어른들이 의논을 하여 그 해 농사 장원을 정한다. 농사장원은 대개 농사를 많이 짓는 부잣집으로 정해진다. 그러면 이 집에서는 막걸리와 닭죽 등 농군들에게 대접할 음식을 장만한다. 농군들은 농사 장원이 된 집의 상머슴을 소에 태우고 농악을 울리고 거들먹거리며 부잣집으로 들어간다. 이 때가 농삿일 중에서는 가장 신바람 나는 때라고 하는데, 만드리하면서 부르는 소리의 사설을 일부 실으면 다음과 같다.
에헤~헤야라~뒤야 어허허 뒤야 에기나 양산도로구나에
에헤~헤야라~뒤야 어허허 에~야 에기나 양산도로구나에
어울러 보세 어울러 보~세 양산도 타랑을 어울러 보~세
에헤~헤야라~뒤야 어허허 에~야 에기나 양산도로구나에
어울러지네 어울러지네 양산도타랑이 어울러지네
에헤~헤야라~뒤야 어허허 에~야 에기나(잘한다) 양산도로구나에
[중략]
[우봉리 들소리 선소리꾼, 홍승동]
「우봉리 들소리」의 선소리꾼인 홍승동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목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노랫말도 거의 잊지 않을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나다. 그는 우봉리에서 태어난 이래 한 번도 마을을 떠난 적이 없는 전형적인 토박이로 어려서부터 유난히 노래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15살 무렵에 논일을 하러 가다가 당시 마을에서 가장 부자였던 윤종호의 집에서 들려오는 축음기 노래 소리에 취하여 등에 지고 가던 지게를 담벼락에 세워두고 온종일 노래만 들었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춘향가·수궁가·심청가·적벽가 등 판소리와 쑥대머리·호남가 등 판소리 한 대목, 육자백이 등 당시에 축음기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듣고서 스스로 터득했다고 한다.
일화로 홍승동이 혼인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의 권유로 노래를 했는데 동서가 ‘재인놈의 자식’이 아닌가 오해할 정도로 노래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마을에서 어른들이 홍승동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권하였던 적이 많았고 그 때 노래를 부르면 마을 사람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홍승동이 부르는 들노래는 마을에서 들일을 하면서 저절로 배운 것이라 한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김메기를 하면 나이 어린 사내들은 뒤를 따라가며 쓰러진 모를 세우는 작업을 했다. 이때 어른들이 부르는 들소리를 들으면서 저절로 익힌 것이라 한다. 물론 홍승동 이전에도 들소리 잘한 사람들은 많았으나 대부분 사망하고 지금은 홍승동에 이어 홍목희와 홍옥희가 맥을 이어가고 있다.
들소리는 선소리꾼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마을 사람 모두가 하나 되어 부르는 소리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봉리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노래 실력이 뛰어나며 전통을 지키고 보존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다. 마을 사람들의 노래 실력이 뛰어난 이유에 대해 주민들은 1950년대까지 우봉리에 거주하였던 재인과 단골의 뛰어난 예술성을 주요한 요인으로 들기도 한다. 조창선·조안종은 마을에 거주하는 무계였는데 인물도 뛰어나고 노래도 매우 잘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하대를 받았지만 재능이 매우 뛰어난 사람들로 기억하고 있다. 신진옥 역시 소리와 농악에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그의 조카인 신유경·신경자 등은 일제 강점기 때 서울에서 널리 알려진 명창이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에게서 직·간접적으로 예술적 기량을 전수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우봉리 백중놀이의 민속문화적 의미]
매년 백중날이 되면 우봉 마을에서는 들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렇게 현재에도 들소리의 전통이 온전히 전승되는 것은 그 마을만의 독특한 문화적 환경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 예술적인 면에서 풍부한 음악적 구성을 갖추고 있다. 이는 홍승동의 가창력과 독특한 음색에서 기인하지만 이를 받쳐주는 마을 사람들의 음색 또한 주요한 몫을 차지한다. 여기에 논매는 소리에서 부르는 양산도 타령은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운 민요인데 경기민요 양산도 타령과 매우 닮아 있어 사당패 소리의 유입을 추측해볼 수 있다.
둘째, 기능적 측면에서 물품기 노래 등은 다른 지역에서 쉽게 찾아지지 않는 특별함을 갖추고 있다. 이는 다랑이 논이라는 생태 환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향토성을 띤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게 평가할 만한 것으로 주민들의 적극적인 의지를 들 수 있다. 들노래는 선소리꾼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뒷소리꾼이 받쳐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봉리 주민들은 하나같이 노래 실력도 뛰어나고 전통문화를 보존하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할 만하다. 주민들의 적극성은 광주 문화 방송 얼씨구 학당 출연, 전남 민속 예술 축제, 화순 풍류 문화 큰 잔치 출연 등으로 그 활동성을 인정받았다. 마을 사람들은 ‘우봉리 들소리 보존회’를 조직하여 활발히 활동하고 위원회를 구성하여 마을에 우봉리 들소리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이 바로 「우봉리 들소리」 전승의 힘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