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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지방도』 「화순현 지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371
한자 1872年地方圖和順縣地圖
분야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건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872년 - 『1872년 지방지도』 「화순현 지도」 제작
현 소장처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 103동[신림동 산 56-1]
성격 고지도
서체/기법 회화식 필사본
소유자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관리자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정의]

1872년에 제작된 군현 지도 중 화순 지역의 지도.

[개설]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전쟁을 겪은 조선 사회는 18세기 영조정조 대에 이르러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각종 문물제도가 정비되고 사회적으로 안정되면서 농업 부문의 생산력 또한 높아지고 더불어 상품 유통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또한 18세기에는 실학을 비롯한 학문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 부분에서도 많은 성과들이 축적되었다. 조선 시대 지도 제작 역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19세기로 넘어가면서 조선 사회는 세도 정치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삼정의 문란 등으로 민생의 안정이 위협을 받게 되었고, 관료 사회의 부패는 정상적인 국가 정책의 집행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외척의 세도 정치를 일소하고 당쟁을 타파하며 군제를 정비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하였다. 특히 두 차례의 양요(洋擾)를 겪으면서 서양의 침략에 적극적인 대응책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국방과 치안을 위한 관제 개정, 군제의 개편, 군사 시설의 확충과 경비의 강화, 군기의 정비와 실험 등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지방의 실정 파악은 시급한 과제였다. 1871년(고종 8)에는 전국적으로 읍지(邑誌) 편찬 사업을 시작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고종 9)에는 전국적인 차원의 지도 제작 사업을 추진하였다. 현재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는 조선 시대 관찬 지도 제작 사업의 마지막 성과로 평가되는 『1872년 지방지도』가 소장되어 있는데 총 459매이다.

[형태 및 구성]

『1872년 지방도』의 「화순현 지도」에서 화순현은 현재의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동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화순읍 교리향청리 일대에 있었다. 화순현은 호남 정맥이 지나가는 산지에 위치한 분지형의 작은 고을로 영산강의 지류인 화순천이 고을을 감돌아 나간다.

「화순현 지도」는 화순현의 모습을 비교적 간략하게 묘사했는데 전라도의 다른 군현 지도에 비해 세밀한 정도가 떨어진다. 광주 지역 서석산 남쪽에서 뻗어온 주맥이 고을의 진산인 나한산(羅漢山)이 되는데 여기에서 내려가는 용맥이 표현되어 있다. 읍치에는 각종의 관아 건물이 울타리와 함께 그려져 있는데 양반들이 수령을 보좌하던 향청이 다른 건물에 비해 크게 그려져 있다. 화순현의 토산물 중에서는 철이 유명했는데 동면 지역에서는 철장(鐵場)이 보이고 있다. 지도 상단에 주요 지역과의 거리가 수록되어 있으며, 건치 연혁 또한 수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1872년 지방도』는 1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제작되어 수합되었기 때문에 통일적인 제작 원칙하에 체계적으로 그려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군현(郡縣) 지도뿐 만 아니라 영(營)·진보(鎭堡)·목장(牧場)·산성(山城) 등을 그린 지도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한 시기에 제작되어 수합된 지방 지도로는 가장 많은 분량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전 시기의 지도보다 큰 규격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지도에 들어있는 정보량은 현재 남아 있는 다른 방안 지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부한 편이다. 때문에 『1872년 지방지도』의 「화순현 지도」에서 근대 개항기 화순현에 대한 정보를 풍부하게 획득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http://kyu.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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