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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최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844
한자 和順崔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집필자 김덕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화순 - 전라남도 화순군
입향지 화순 최씨 입향지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유천2리 갱정 마을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화순 최씨 세거지 - 전라남도 화순군
묘소|세장지 화순 최씨 묘소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만호산
성씨 시조 지백호
입향 시조 최세기

[정의]

최세기(崔世基)를 시조와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화순군의 세거 성씨.

[개설]

화순 최씨는 호남에 세거하던 호족으로 대대로 덕행과 유학에 뛰어났다. 고려 시대 최세기가 화순의 옛 이름인 오산(烏山)에 봉군되어 오산군(烏山君)이 되어 이후 후손이 화순에 세거하면서 다수의 관료를 배출하였다. 최부는 문하시중을, 최윤의는 문하 시랑 평장사를, 최계신은 봉상대부를 역임하고, 조선 시대에 최수는 숭록대부를 역임하였다.

[연원]

화순 최씨의 시조 최세기는 고려 때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화순군에 봉해짐으로써 화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최세기와 같이 몽골군의 침입 때 공을 세우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최부(崔傅)를 함께 시조로 삼기도 한다. 그 후 상계가 실전되어 서북면 도감판관(西北面都監判官)을 지낸 최언(崔堰)를 기세조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최윤의(崔允儀)를 기세조로 삼는 계통도 있다.

[입향 경위]

최세기는 고려 중엽에 효행으로 천거되어 평장사를 거쳐 남도 안렴사(南道按廉使)가 되었다. 이후 몽골군의 침입 때 공을 세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에 이르고, 오산군에 봉해져서 화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후손들이 화순에 세거하면서 본관(本貫)을 화순으로 하였다.

[현황]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화순 최씨의 기세조(起世祖)를 최언(崔堰)으로 보기도 한다. 최언은 고려 때 서북면 도감 판관(西北面都監判官)을 지냈다. 최언의 아들은 최계신(崔繼臣)이고, 최계신의 아들은 최영호(崔永浩)[?~?]와 해주 목사를 지낸 최영유(崔永濡)[?~1361]이며 이때 두 파로 갈라졌다.

5세에 이르러서는 감찰공(監察公) 최덕윤(崔德潤), 밀양공(密陽公) 최자해(崔自海), 부정공(副正公) 최자하(崔自河), 문정공(文貞公) 최자강(崔自江), 대사성(大司成) 최자빈(崔自濱)으로부터 5형제파가 분파되었다.

2000년 인구 주택 총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국의 화순 최씨는 9,572가구 3만 1173명이고, 화순군의 화순 최씨는 20가구 67명이었다. 현재 화순에 있는 화순 최씨의 수는 많지 않으나 화순읍 순곡 마을, 중지 마을 등에서 살고 있다.

[관련 유적]

고려 시대에는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갱정 마을에 화순 최씨가 입향하여 번성하여 삼정승(三政丞) 팔판서(八判書)가 배출되어 만연산(萬淵山) 아래의 마을을 팔판동(八判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최씨들이 각지로 흩어지면서 후에 이곳에 다시 돌아와 우물을 먹겠다고 떠나서 이 우물을 갱정(更井), 한림정(翰林井), 최씨 우물이라 하였고 오늘날에는 ‘최정승 못골’이라 한다. 그 영향으로 마을 이름 또한 갱정리가 되었다. 화순읍 만호산(萬湖山)에는 시조묘가 있는데, 비석에는 ‘최씨 묘(崔氏墓) 효자 세기(孝子世基)’라고 쓰여 있고 또 한쪽에 ‘봉오산군(封烏山君)’이라고 쓰여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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