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8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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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和順金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집필자 | 김덕진 |
본관 | 화순 김씨 - 전라남도 화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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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화순 김씨 입향지 - 전라남도 화순 |
세거|집성지 | 화순 김시 세거지 - 전라남도 화순 |
성씨 시조 | 김수로 |
입향 시조 | 김창일 |
[정의]
김창일(金昶日)을 시조로 하고 전라남도 화순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
[개설]
김창일은 신라(新羅) 경애왕(景哀王) 때 견훤(甄萱)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순절하였는데, 이 공을 인정받아 화순군(和順君)에 봉해졌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화순(和順)을 본관으로 삼았다.
[연원]
김창일은 김알지(金閼智)의 24세손인 김안(金安)의 아들이다.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신라(新羅) 경애왕(景哀王) 때 견훤(甄萱)이 수도에 침략해 왕을 시해하였는데, 김창일은 이에 맞서 싸우다 순절하였고 이 공을 인정받아 화순군(和順君)에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은 화순(和順)을 본관으로 삼았다.
[현황]
김익구는 자가 사겸(士謙)이며, 1675년(숙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통훈대부, 결성 현감, 춘추관 기사관 등을 지냈다. 1678년 김후영(金後榮)[1647~?]이 무과(武科) 증광시에 병과(丙科)로, 1695년 김세구(金世耉)[1671~?]가 무과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7년 김정재(金鼎載)[1839~?]가 문과 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05년 김달희(金達禧)[1761~?]가 사마시(司馬試) 증광시에 2등, 김상정(金祥廷)[1766~ ]이 3등으로 급제하였다. 1807년 김적조(金迪祖)[1760~?]가 사마시 식년시에서 3등으로 급제하였고, 1882년 사마시 증광시에서 김응렴(金應濂)[1824~?]이 2등, 김재범(金載範)[1857~?]과 김철화(金哲華)[1860~?]가 3등으로 합격하였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 주택 총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국의 화순 김씨는 504가구, 1,570명이고, 화순군의 화순 김씨는 1가구 3명이었다. 화순 김씨는 서울, 경기, 경상북도 등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