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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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邢世英 |
이칭/별칭 | 춘영(春英),도곡(道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해장 |
[정의]
조선 전기 기묘사화를 피하여 전라도 화순 지역에 입향한 문인.
[가계]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춘영(春英), 호(號)는 도곡(道谷)이다. 학사(學士) 형옹의 후손으로서 충청 병사(忠淸兵使) 형군철(邢君哲)의 5세손이고 아버지는 벽동 현감(碧潼縣監) 자홍(邢自弘)이다.
[활동 사항]
형세영(邢世英)[1507~1581]은 1519년경 기묘사화의 변을 피하여 나주 남평 우산리 골모리를 거쳐 매산등(梅山嶝)으로 입향하였다. 만년에 용덕(龍德)의 남쪽 예동(禮洞)의 오른쪽에다 정자를 지어놓고 ‘도곡(道谷)’으로 편액(扁額)을 붙였는데 이는 ‘효우(孝友)를 근본으로 삼고 시례(詩禮)를 가문 대대로 전수한다.’는 도리를 취한 것이었다.
조광조(趙光祖), 양팽손(梁彭孫)과 같이 도의(道義)의 벗을 삼아 성리학을 강론하면서 세상의 사물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정주(程朱)[宋代의 학자 程子와 朱子]의 학문과 산수(山水)의 낙을 자신의 업으로 삼았다. 사람들과 경쟁하지 않고 너와 나의 한계를 긋지 않았으며 검소한 생활을 안주하고 호화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였다.
초야에서 늙은 것을 달갑게 여기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종신토록 도(道)를 즐기고 살았으므로 원근의 사람들이 추앙하고 세상에서 도사(道士)라고 일컬었다. 유림(儒林)들이 공을 지표(指標)로 삼아 여러 차례 상소(上疏)한 끝에 독실한 행실로 선발되어 경릉 참봉에 발탁되었으나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