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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1555
한자 演劇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위경혜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에서 무대 위 배우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종합 예술이자 행위 예술.

[개설]

전라남도 화순군의 연극 활동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청년 운동 단체에 의해 시작된 소인극에서 비롯되었다. 소인극(素人劇)은 전문 배우가 아닌 사람들이 하는 연극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회 혁신과 계몽 차원에서 기획·연출된 연극을 말한다.

일제 강점기 화순군의 연극 활동은 청년 운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특히 능주 지역에서의 연극 활동이 두드러진다. 현재 화순군이 화순 지역의 중심이지만, 근대 이전 시기에는 능주가 화순 지역보다 상급의 고을이었고 지역 주민 생활의 중심 기능을 담당하였다. 1913년 능주군이 화순군으로 개칭되고, 1914년 화순군과 병존하던 동복군 마저 화순군에 편입되면서 화순군이 문화 활동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화순군은 지리적으로 대도시인 광주광역시와 가까워 현재 연극 활동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1920년대 청년 운동과 소인극 공연]

화순군에서 연극 활동은 192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다. 『동아일보』 1921년 4월 12일자 4면 「화순 청년회 근황, 소인 연예(素人演藝)를 흥행으로 거금(醵金)」이라는 기사에 따르면, 박재순(朴在順)이 회장으로 활동하는 전라남도 화순 청년회가 아마추어 흥행으로 수백여 원의 기금을 모아 청년회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화순 지역의 연극 활동이 가시화된 것은 1921년 5월 이후의 일로 능주 지역에서 펼쳐진 소인극 공연이었다. 즉 『동아일보』 1921년 5월 17일자 4면 「능주 청년회 소인극(陵州靑年會素人劇), 은덕(恩德)과 청년(靑年)의 경(鏡)이라는 제목(題目)으로」라는 기사에 따르면, 능주 청년회가 청년회의 진흥을 위하여 1921년 5월 7일부터 3일간 「자연(自然)의 애(愛)와 무한(無限)의 해(海)」와 「은덕(恩德)과 청년(靑年)의 경(境)」이라는 아마추어 연극을 공연하였다. 공연 내용은 가정제도 혁신과 사회 발전 필요, 그리고 부랑자의 반성 촉구 등 계몽을 강조한 것이었다. 연극 공연에 대한 관객 반응이 좋아서 2백여 원에 달한 기부금이 능주 청년회 발전을 위해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능주 청년회 연극은 당시 능주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면서 만장의 갈채를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매일신보』 1921년 9월 19일자 기사에 따르면, 능주 청년회의 소인극 활동이 대중의 호응을 얻자 소인극이 연극의 틀을 갖추고 공연 활동을 확산하였다. 지역 유지들의 향학심을 일깨우기 위해 능주 청년회 소속 조연승(曹練承) 외 3~4명이 소인극회를 새롭게 조직한 것이다. 능주 청년회 회원은 1921년 9월 16일부터 4일간 청정 회관(靑正會館)에서 공연을 갖고 수입금을 동부(同部) 야학 경비에 사용하였다.

지역 청년 단체의 소인극 공연은 192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중외일보』 1928년 5월 28일자 4면 「야학 위하여 소인극 준비」라는 기사에 따르면, 전라남도 능주 농민회와 화순 청년 동맹 능주 지회가 야학을 위하여 소인극을 준비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중외일보』 1928년 6월 11일자 4면 「야학 위해 소인극 흥행, 성황을 이뤄」에 따르면, 1928년 6월 6일과 1928년 6월 7일 양일 화순 청년 동맹 능주 지부와 능주 농민회가 주최하고 중외 일보사 능주 지국과 동아 일보가 후원하여 농민 야학과 부녀자를 위한 소인극 공연이 벌어졌다.

당시 소인극의 인기는 공연 기부금을 헌납한 사람들의 숫자와 명단을 통해 드러나는데, 1928년 6월 6일부터 이틀 동안 열린 공연 기금 기부자는 28명에 이르렀고 이 가운데 일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1920년대 화순 지역 연극 활동의 번성은 당대 청년 단체의 활동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연극 활동은 전문적인 기획과 연출, 그리고 연기 능력을 갖추고 진행된 활동이었다기보다는 지역민을 계몽하는 차원에서 벌어진 아마추어 활동이었다. 당대 연극에 대한 열의를 반증하듯, 청년 단체 소속 회원들은 전등 시설도 없는 가운데 소인극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1929년에 들어서야 화순군에 전등이 가설되었기 때문이다.

[6·25 전쟁 기간 및 이후 연극 활동]

1930년대 이후 화순 지역 연극 활동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1920년대 계몽 운동 차원에서 벌어진 강연(講演)과 소인극 활동의 전통이 부활한 것은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인민 공화국 치하 시절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즉, 화순군 춘양면 지역 청년들이 즉흥적으로 극을 만들어 우익 계열의 특정 인사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일종의 공산주의 사상을 교육하는 차원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허구적인 세계를 빌려 온 아마추어 연극이었지만, 내용 가운데 지역 우익 인사의 실명(實名)까지 직접 거론하는 등 민감한 문제를 다루었다.

화순 지역 전문 연극 집단은 없었으나 연극 공연은 6·25 전쟁 이후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화순읍 시장 일대에서 소위 ‘약장수’로 불린 떠돌이 상인 집단이 지역민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심청전」과 「춘향전」 등을 공연하였기 때문이다. 떠돌이 상인들을 따라다니며 단막극 배우로 유명한 사람도 생겨났는데, 화순 지역 출신인 하재옥이 대표적이며, 「심청전」 ‘심봉사’ 역할로 인기를 누렸다.

화순 지역 청년 단체 연극 활동 역시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매년 한가위가 되면 지역 청년들이 주최하여 만담(漫談)과 아마추어 연극 등을 가설 무대에 올려 화순 지역민에게 위안을 제공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화순 지역에서의 연극 활동은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인근인 광주 지역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화순군의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1970년대 초반 화순 지역과 광주 지역을 잇는 너릿재 터널이 개통되면서 화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연극 활동은 거의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화순군이 공연장을 건립하면서 연극 공연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1984년 화순 군민 회관이 문을 열면서 마당극 형식의 공연을 가끔씩 상연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2009년 하니움 문화 스포츠 센터 개관으로 한국 문예 회관 연합회가 주도하여 소외 계층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펼치는 연극과 뮤지컬 공연이 지역에서 열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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